1993년 태어나 올해로 26살인 데니스 텐은 현지시간으로 어제(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괴한에게 피습을 당해 숨졌습니다.
카자흐스탄 현지에서는 장관이 직접 데니스 텐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등 침통한 분위기입니다.
아구르탄벡 무하메디울리 문화체육부 장관은 데니스 텐이 아마티의 쿠르만가지-바이세이토바 거리에서 피습당했다고 밝혔습니다.
데니스 텐이 자신의 승용차 백미러를 훔치는 범인 두 명과 난투극을 벌이다 칼에 찔렸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상세히 전했습니다.
데니스 텐은 1907년부터 이듬해까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의병장으로 맹활약했던 고 민긍호 장군의 5대손 외고손자입니다.
데니스 텐의 고조부인 민긍호 장군은 1907년 구한말 대한제국 원주 진위대에서 지금의 장교와 유사한 계급인 정교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907년 한일합병을 추진하던 일본이 최대 장애물로 여기던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하자 대한제국군 소속 군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이를 거부하며 무장 투쟁에 나섰습니다.
서울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인 박승환 참령이 강제 해산에 항의하며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 투쟁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민긍호 장군은 원주 진위대원들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을 주 활동지역으로 하는 의병대를 창설하며 무장 투쟁을 했습니다.
이후 원주 남산으로 도망친 일본 경찰대를 추격해 패퇴시킨 뒤 추가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도 물리쳐 첫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민긍호 장군의 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 됐기 때문에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나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8월부터는 강원도와 충정도에서 활약하던 이강년, 김군필, 한갑복 등 여러 의병장과 긴밀히 연락하며 산악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민긍호 장군은 대한제국군 해산 이듬해인 1908년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과 함께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의 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아 13도 창의군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된 민긍호 장군은 경기도 가평을 거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며 서울 진입을 눈 앞에 두기도 했습니다.
민긍호 장군의 의병부대는 강원도 원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겹겹이 포위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교전이 길어지면서 탄환이 떨어지는 등 불리한 형세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1908년 2월 치악산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민긍호 장군을 비롯한 의병대가 끝내 격렬히 전사하며 불꽃 같았던 항일 투쟁은 마무리됩니다.
민긍호 장군의 순국으로 의병 가족인 민 장군의 부인과 아이들은 급히 몸을 피해야 되는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급히 피신한 가족들은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의병 가족들의 고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소련이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바람에 민긍호 장군의 가족들도 카자흐스탄으로 떠 밀려 가게 된 겁니다.
민긍호 장군의 아들 고 민영욱 선생은 안톤과 레오니드, 세레나, 알렉산드라 등 2남 2녀를 뒀고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두 딸과 그 후손들이 50여 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데니스 텐은 세레나 씨의 외손자입니다.
데니스 텐은 자신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의병장의 자손이자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던 한국계 젊은이었습니다.
데니트 텐은 "경기를 할 때마다 항상 돌을 가지고 다닌다. 미신을 잘 믿지는 않지만 행운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물건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