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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지리산에서 평화를 꿈꾸다 -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다 ④

[라이프] 지리산에서 평화를 꿈꾸다 -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다 ④
▲ 걷는다는 것은 실상 발을 떼었다 놓는 과정의 연속이다.
 
 길 위를 걷는 사람들 

무릇 길 위에서 걷는다는 것은 구조적으로만 보면 대지에 발을 딛고, 다시 그 발을 떼어 내딛는 행위의 반복일 뿐이다. 한 발 또 한 발... 그렇게 내딛는 단순한 몸동작이 걷기의 본질이다. 그 단순한 동작이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는 왜 이 먼 곳 지리산까지 와서 그 일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유야 많을 것이다.

그 이유란 것이 남아도는 시간에 진력난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일 수도 있고, 그냥 남들이 하니까 덩달아 따라 나선 누군가의 첫경험일 수도 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길 수집가의 편력의 결과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론 누군가에게는 오랜 시간을 별러온 꿈같은 로망의 실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행위에 동반하는 그 수고스러움을 견디며 나아가는 ‘그와 그 과정’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길 위를 걷고 있는 그들은 두 다리로 대표되는 몸이 느끼는 수고스러움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여름날의 거세지는 햇살을 받으며, 땀이 뚝뚝 떨어지는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그 과정은 그가 걷는 이유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길을 걷는다는 행위에 동반하는 그 수고스러움을 견디며 나아가는 ‘그와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이유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러(?) 온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길과 산의 매력에 빠질 수도 있고, 오랫동안 품었던 로망이 고행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듦을 이겨낸 몸은 마음의 눈을 뜨게도 한다.
걷기에는 나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있다.
혹여 운이 좋다면, 길을 걷는 그들은 이전에는 소유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새롭게 얻을 수도 있으며, 새로운 깨달음으로 자신과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잊고 살았던 자연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흐르는 땀방울에서 쿵쾅대는 심장을 통해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불현듯 확인할 수도 있으며, 길 위에서 만난 작고 소박한 들꽃에서 환희와 희열을 얻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나 역시 걷고 있다. 그 결과로 이렇게 이러니저러니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지만, 걷는 행의에 대한 그 정확한 의미는 나 역시 모른다. 다만 느낄 뿐이다. 걸음이 쌓일수록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나를 느끼고, 또 간간이 만날 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걷는 이유다.
 
등구재를 오르는 친구. 고생이야말로 성취감의 원천이다.
평소에는 체력이 좋았던, 한때는 마라톤까지 섭렵했던 내 친구는 바쁜 일상으로 인해 퇴보한 체력과 나이듦, 그리고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해 등구재마저 힘겨워 보인다.(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이긴 하다.) 땀으로 범벅인 친구는 친구를 잘못 만난 죄(?)로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지만,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고생이야말로 성취감의 어머니라더니, 아마도 친구 역시 그 법칙 안에서 성취감이라는 열매의 단맛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통로이다.
지금이야 쓸데없이(?) 걷는 이가 많아지고, 길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의미도 부여하고 말도 많지만(내가 그렇다ㅠㅠ), 지난 수천, 수만 년 동안 길의 존재 이유는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의 가치가 전부였던 물건이 아니던가.

팔자 좋은(?) 그들이 이 길에 나타나기 전까지 등구재를 포함하는 많은 지리산의 둘레길은 누군가의 삶과 생활의 부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통행의 목적을 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그저 산야의 이름 없는 땅이었을 뿐인 것이다.

등구재는 지금이야 산 아래 엄천강을 따라 흐르는 신작로에 역할을 다 빼앗기고 겨우 몇 명만 오가는 도보 여행자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지만, 과거에는 마천 일대의 마을과 산내의 마을을 연결해주던 핵심 로드(?)였었다. 이 길을 지나 꽃가마 타고 시집을 갔었고, 장을 보러가고, 또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넘나들던 고개요 길이었다.
등구재 쉼터의 모습
그렇게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창구이자 끈이었으며, 이 마을과 저 마을의 사람들이 오고 간 흔적들의 집합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흔적들을 이어 놓은 것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120여 개 마을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환희가 깃들어 있으며, 그 사람들이 오고간 흔적들이 274km의 지리산 둘레길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제주의 올레길에서 ‘올레’가 마을과 마을,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을 뜻하듯, 지리산 둘레길의 길들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과 왕래의 결과였던 것이다. 첩첩산중, 이 산간에도 사람들은 옹기종기 그들의 공동체를 꾸리면서 자연과 벗 삼아 사이좋게 살고 있었고, 또 살아가는 중이다.
 
두릅이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마을이 있으니 많은 밭들이 있고, 그 밭에서 봄을 맞아 소생하는 적지 않은 농작물과도 만나게 된다. 그중 유독 우리 눈에 뜨인 것은 두릅이다. 아니 우리는 두릅에 꽂히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작고 여린 가지에 돋은 새순이 보이면 다 두릅으로 보였다. 어설픈 두 촌놈은 두릅이네, 아니네, 차라리 개두릅(엄나무 순)이네 어쩌네 하면서 꽤 여러 시간 동안 새순만 보이면 어쩌구저쩌구 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 정말 두릅 같아 보이는(최소한 개두릅처럼은 보이는) 새순을 만났으니, 둘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 밭일 하시는 어느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어떤 거? 저거? 네. 그건 호두나무여...”
두릅일까? 아닐까?
헐~ 나름 촌놈이라 생각했는데, 호두나무도 몰라봤던 것이다. 새삼 작은 호두나무의 순을 보고 두릅이라고 우겼던 우리의 무지함과 그 무지함으로 친구와 나는 즐거웠고, 한편으론 이 산 저 산의 두릅이 우리 도보여행의 작은 이야기꺼리였고 양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또 다시 누군가와 더불어 걷는다면 이러한 즐거움이 동행의 의미이자, 이유가 될 것이다.

● 뱀이다!

그렇게 마을이 머지않은 때에 길조차도 포장도로라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허걱~ 뱀이다. 하마터면 밟을 수도 있는 찰나에 나의 뛰어난(?) 운동신경이 몸을 붙들었기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나나 뱀이나 둘 중에 하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뱀이 길을 막고 앉아 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길 중에 왜 하필이면 신작로 한가운데서 똬리를 틀고 있더란 말인가. 낮의 햇살에 달궈진 포장길의 따스함이 좋았던 것인가. 놈은 한가로웠고, 그러니 또 여유로웠다.

하지만 여유로운 자세에 비해 생김새는 날카로웠다. 대가리는 마름모 모양으로 맹독을 지닌 살모사의 낯짝을 하고 있었고, 비록 그리 큰 놈은 아니었지만 그 대가리를 한번 들고 째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그리고 뱀은 그 생김새와 이미지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는지라,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작대기를 들어 놈을 풀숲으로 내던지며, 사람길이 아닌 네 길로 다니라며 충고 반, 호통 반... 나름 혼을 냈다. 놈은 살짝 긴장하는 듯하더니 이내 듣는 둥 마는 둥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었다.
창원마을의 모습
 길이 변화시킨 마을

마을이 보인다. 창원마을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마을에서 민박이라도 하면서 두런두런 마을 이야기며, 산촌의 거친 환경에서도 온화하게 살아가시는 어른들의 인생 이야기도 듣고 싶었지만, 그럴 참이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곳에도 둘레길 덕분인지 카페도 있고, 나름 활기가 느껴진다. 길 하나가 마을을,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좁고 닫힌 세상이었을 이곳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향해 문이 열렸고, 그만큼 확 넓어진 것이다. 이곳 분들도 어쩌다가 우리 동네 같은 곳에 매일같이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는지 그게 신기하다고 되뇔 정도다.
 
산 아래 옹기종기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간다. 창원마을의 모습
그렇게 새삼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 당장 많은 이들이 걷고 있어서가 아니라, 걷는 이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형태의 편의시설이 의외로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쉼터며 주막, 그리고 펜션, 그리고 민박집을 알리는 프랑카드며 간판까지... 사실 오지(?)라면 오지랄 수도 있는 이곳에 이토록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오고 가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게다.

둘레길 하나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야 그야말로 금상첨화이겠으나, 무분별한 개발이 되지 않도록 민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난개발이 자칫 지리산 둘레길이 가진 고유의 맛을 헤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기우이길 바라는 그 마음 때문이다.

또 다른 염려는 겨우 고개 하나를 넘어 오고가던, 딱 그만큼의 세상을 사시던 옛날의 그분들이 사시는 마을에 끊임없이 찾아드는 낯선 이방인들이 어떠할지... 혹여 그분들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닐는지 살짝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적지 않은 민박집 간판들이 오히려 이방인을 반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여하튼 현명하고도 살가운 공존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마을 곳곳에 감나무가 가득하다.
마을로 들어서자, 집집마다는 감나무 한 그루씩은 당연하다는 듯 품고 있다. 가을이면 마을은 홍시가 뿜어내는 붉음에 취해 한 폭의 그림이 될 것만 같다. 그런데 노인들만 사시는 이곳에서 나무 끝의 감은 누가 딸꼬? 그것도 걱정이다.

이곳 창원마을은 이 일대 마을에서 경작한 작물이며 물품 등의 공물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원래의 마을 이름은 ‘창말‘이었단다. 일제는 이런 산간 마을까지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은 그 옛날의 창고는 사라진지 오래고, 마을 이름조차도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 '창원마을'이 됐다고 한다.
 
둘레길 이정표 뒤로 지리산의 고봉들이 늘어서 있다.
마을을 벗어나자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 너머 저 멀리 지리산의 고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천왕봉(1,915m)이 보이고 그 옆으론 토끼봉(1,538m), 제석봉(1,806m), 연하봉(1,730m)이 있고, 또 반야봉(1,732m)이 있다.

 길에서 삶을 듣다

마을을 지나고, 또 어느 다랑이 논을 지나고, 그렇게 무심코 걷다 돌아본 지나온 길들이 꾸불꾸불 이어져 내게로 달려오는 것만 같다. 삶의 길이어서 그런가. 느리고, 또 아득하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른다. 굽이굽이 마다에 담겨있을 이런저런 삶의 애환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느꺼움이 있다.
 
길 위에는 길을 걸어간 그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또 한편으론 무심하다. 강팍한 삶의 모습이었다가 달관한 자의 여유랄까 ’그래서 뭐?’하는 도발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지난 애환이나 아픔이야 기억은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매여 살 수도 없지 않느냐는 힐난이 들어 있는 듯도 하다. 세상의 이치야 세월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니 무엇인들 크게 다를 것이 있겠느냐는 질문도 담겨 있는 것만 같다.

허기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아 있음이 중요한 것이거늘 뭘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지나온 날이 아니라, 살아갈 날들임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다. 세상도 변하고 가치도 변한다. 이 구불구불 오솔길이 명품길로 인정받을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해탈의 문을 나서기라도 하는 양 걷는 그가 의젓하다.
숲길을 걷다 만난 ‘사진 찍는 곳’이라는 이정표. 왠지 분위기 있는 사진이 나올 것 같은 나무터널의 끝이다.

친구가 자세를 잡아보겠다니 한 장 찍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광의 효과로 인해 실루엣이 의외로 근사하다. 무언가 해탈의 문을 나서기라도 하는 양 의기양양하기도 하고, 또 어쩌면 갑작스런 둘레길 걷기라는 여정에 끌려와(?) 고생 아닌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나름 보람이 있었다는 듯 뿌듯함도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족했다면, 나 역시 고마운 일이다.
길은 그저 고즈넉하다.
시나브로 오늘의 여정도 끝이 보인다.

여정의 마지막을 아쉬워할 즈음, 앞산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채석장이라는 친구의 설명이다. 채석장에서 채굴하고 있는 광물은 마천석. 국내 유일의 검은색 화강암이라고 한다. 색깔이 검은 이유는 운모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라는데, 인테리어 자재로 꽤나 유용해 가격도 제법 나간다고 한다. 건축 설계 일을 하는 친구라 제 전공과 관련한 것이 나오자 쫌~ 아는 척을 한다. 인정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 멀리 산 아래로 금계마을이 보인다. 금계마을은 안국사 아래 생겨난 사하촌(寺下村)이었다고 한다. 금계라는 이름의 유래는 뒷산 이름이 금산이었고, 마을의 모양이 닭을 닮았다 해서 금계가 되었단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노디목. 물을 건널 때 딛는 디딤돌, 즉 징검다리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징검다리 마을이야말로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벌어진 민족적 비극의 현장 중 하나이다.
지리산의 능선마다에는 역사의 아픈 사연들이 스며있다.(사진제공 : 국립공원관리공단, 류준배)
당시 군경 토벌대는 대공세에 앞서 지리산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던 마을들이 빨치산의 식량 보급처이자 은거지가 된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소개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때 근동에 흩어져 있던 추성, 의평 등의 여러 마을을 불태우고 강제로 이주를 시켰는데, 그들이 이주해 온 곳이 바로 이곳 금계마을이었던 것이다.

당시 그렇게 해서 모여든 가구 수는 약 200여 가구. 강제로 쫓겨 내려온 그들에게 온전한 집이 기다리고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학교운동장이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코딱지만 한 움막을 치고 대여섯 명의 식구들이 옹기종기 몰려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1년을 살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부쳐 먹을 땅이 있는 산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금계마을에서 움막이나마 치고 살아남은 그들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금계마을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다른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말이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모습
 ‘함양산청양민학살’사건

당시 지리산 인근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맡은 부대는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었다. 이 부대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이 작전이 의미하는 바는,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 마을 자체를 불 지르고 파괴하여 그들에게 최소한이라도 거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금계마을로 밀려 내려왔던 산간마을의 주민들이 이 작전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 작전 안에는 피의 살육이 도사리고 있었다. 집과 물자뿐만 아니라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그것이다.

‘거창양민학살’로 대표되는 군경들이 저지른 무고한 양민 학살이 이곳 지리산 언저리에서도 자행되었던 것이다. ‘함양산청양민학살’이 그것이다. 이 학살로 무려 705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설 다음날인 51년 2월 8일 이른 아침, 지리산 줄기에 자리 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 부락들에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 소령 한동석) 병력들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무작정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골짜기로 끌고 가 아이와 부녀자 가릴 것 없이 총을 난사해 죽였다. 양민 학살의 시작이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자료사진)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골짜기에서, 들판에서, 또는 강가에서 차례차례 총을 맞고, 수류탄에 포탄에 온몸이 찢기면서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은 주민들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게하고 그 자리에서 총을 난사해 사살한 후 그 구덩이에 묻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마을의 가축은 끌고 가 그날 밤 그들의 숙영지에서 그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배불리 먹은 그들은 그 다음날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 ‘거창양민학살’을 자행한다. 아무리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그들이 불과 며칠 동안 저지른 학살의 규모는 1,500여명.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집단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이렇게 비명에 간 무고한 주민들은 어느 순간까진 공비(共匪)가 되어야 했고, 학살 부대의 수훈이자 전과가 되었던 것이다.
 
거창양민학살을 다룬 영화 ‘청야’(2013) 포스터.
그로부터 어언 70여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그 날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아직도 오롯이 드러나지 않았다.

●  역사는 진실을 원한다

민주화 이후 1996년 관련 특별법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민주화된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그들을 우리가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건만 유족들만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그들만의 역사’로 자리매김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그것이다.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모습
철저한 조사는 역사 바로세우기의 시작이다. 이를 통해 가해자인 국가는 국민들에게 사죄와 자기반성을 하여야 하며, 그에 따르는 보상 내지 배상이 이루어져야 역사는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두웠던 과거의 어쩔 수 없었던 사건‘이라는 식의 축소 내지 왜곡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고, 불행했던 과거와의 단절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까지도 80년 광주를 비롯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들이 지속적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영원토록 이 길 위에 평화만 가득하기를...
이제 지리산 둘레길의 여정이 끝이 났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새삼 어두웠던, 그래서 아팠던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지리산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무대로 하여 펼쳐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 원인들이야 단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임을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남북정상회담과 연이어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를 비롯해 전쟁 없는 한반도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지 6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휴전 상태인 이 땅, 한반도에 완전한 전쟁 종식과 영원한 평화가 정착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바이다.
 
지리산에 찾아온 평화 (사진제공 : 국립공원관리공단, 강대식)
※ 교통정보

◈ 버스
서울(소요시간 4시간 32분)
서울 → 동서울종합터미널(02-446-8000) → 백무동시외버스정류소 →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
 
◈ 자동차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길 5/ 055-964-8200)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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