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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법원에는 판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가면 법대 위에는 판사들이 있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법원 관계자들도 있다. 원고와 피고 양측이 전하는 의견서와 서류를 전달해 주고 법정에서 벌어진 별론의 요지를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맡는 참여관, 법정 내 소란 상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해 재판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업무를 맡은 법정 경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업무는 법정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소송이 제기되면 관련 서류를 검토해 기록의 기본적 오류를 바로 잡고, 관련 서류를 소송 상대방에게 전달해 재판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업무도 맡는다. 1만 6천여 명의 사법부 종사자 중 2,800여 명의 판사를 제외한 대다수를 차지하는 법원 공무원들이다. 이들 없이는 재판은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 재판부로 각기 나눠져 있는 법원에서 판사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이들도 법원공무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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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최근 알려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 사태와 관련해 가장 앞장서 목소리를 높이고,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사람들도 이들이다. 일각에선 ‘판사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그러냐’는 볼멘소리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사법부의 구성원으로서 사법부의 신뢰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한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나선 사람 중의 한 명이 박정열 법원노조 서울중앙지부장이다. 박 지부장은 지난 금요일(8일)부터 서울중앙지법로비에서 사법 농단 사태에 수사 촉구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법원노조가 노조 관련 문제를 제외하고, 사법부 문제와 관련해 법원 내에서 농성은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8년 법원 공무원이 된 박정열 지부장은 올해로 법원 근무 만 20년 차가 됐다. 박 지부장은 본인이 투사라서 단식에 나선 것은 아니라며, 단지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 부끄럽다는 게 어떤 부분인가?

= 과거 촛불사건 재배당 사태도 경험을 했다. 다만, 당시에는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재판 배당과 관련한 개인적 일탈 행위였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사법부 존재의 근거인 ‘판결의 공정성’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법원 공무원들이 힘들어 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었다.


- 판사들은 가만히 있는데, 법원 공무원들이 왜 나서냐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 법원 공무원들은 공무원이기 이전에 국민이다. 공개된 문건,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의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법원의 얼굴은 판사들이지만, 법원 공무원도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혹이 제기된 이후 법원 공무원들이 국민들의 항의 전화를 많이 받고 있다. “사법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항의부터 시작해, “자신이 패소한 재판도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내용이다. 그런 전화를 받는 것은 판사가 아닌 법원 공무원들이다. 전화를 통해 국민의 불신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부끄러운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박정열 법원노조 서울중앙지부장 (가운데)
● 행정처의 엘리트 판사들…그들은 왜 그랬을까?

공개된 문건을 보면, 사법권 독립을 훼손할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은데, 판사이기도 한 행정처 심의관들이 왜 스스로 사법권 독립을 훼손하는 문건들을 작성했는지도 의문이다. 법원 공무원들 중에는 이들과 같이 일했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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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공개된 문건을 보면, 실행 여부와 관련 없이 그런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문건을 작성한 판사들과 근무한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분들의 반응은 어떤가.

= 문건을 작성한 사람들은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다. 재판도 잘 하고, 직원들에게 친철해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아이러니라는 반응이 많다. 법원행정처에 가면 그렇게 되는 건가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 개인적으로 발탁됐다는 자부심, 승진에 대한 욕망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행정처에 간 엘리트 판사들은 대부분 2등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건 주변 사람들의 눈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1등 의식, 윗사람들에게 잘 보여 칭찬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이런 일을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하다.


● 정작 당사자는 아직 말이 없다

박 지부장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에도 근무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은 아니다. 다만, 행정처 엘리트 판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지는 목격했다고 한다. 야전침대를 사무실에 두고, 숙식을 사무실에서 해결하면서까지 판사들이 일에 매진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가 이런 것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 판사들은 판사회의 말고는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데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없나?

= 과거에 같이 근무했던 판사들이나 연락을 해 본 판사들 대부분이 이번 사태에 분노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만, 판사 사회는 파편화된 조직이다. 재판부별로 나뉘어 있고, 사건에 치이다 보면 현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나서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태를 지나면서 판사들의 업무를 경감시킬 수 있는 방안도 모색되기를 희망한다.


오늘로 박 지부장은 단식 3일째를 맞았다. 내일부터는 전국 법원노조 지부장들도 단식에 나선다. 전국법관회의가 열리는 사법연수원 앞에서는 법원노조 등의 기자회견도 예정되어 있다. 사법 농단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는 아니지만,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촉발한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또 다른 핵심 당사자들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은 아직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조직을 사랑한다고 평가를 받아왔던 사람들이지만, 조직이 위기에 처한 지금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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