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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촛불'

항공업계 비정상적 '표준' 깨는 계기 돼야

[취재파일]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촛불'
사회 나와 번 돈으로 처음 국제선 항공기를 탔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 한다. 커다란 쇳덩이에 몸을 싣고 구름 위를 난다는 경이감 때문이 아니다. 휴가비 몇 푼 아껴보겠다고 직항 국적기를 두고 미국 항공사를 택한 게 문제였다. 간식으로 나온 만두 비슷하게 생긴 음식에선 기름이 흐르고 있었다. 휴지를 달라는 내게 검은머리지만 아마도 미국인일 승무원이 유창한 우리말로 말했다. “휴지는 화장실 가서 뜯어 쓰세요.”

옆자리에 탄 노파는 LA 사는 아들 내외를 보러 가는 길이라 했다. 평생 대한항공을 탔다는 그녀에겐 외항사의 ‘서비스’가 적잖이 당혹스러웠나보다. 나는 11시간에 걸쳐 내가 탄 비행기와 대한항공의 비교 체험담을 들어야 했다. 착륙을 앞두고 입국서류를 쓸 때도 그녀는 “대한항공 보면 이런 건 우리 아가씨(승무원)들이 다 해 줘”라며 자못 느긋해하다 한 방 맞았다. 그녀가 ‘대리 작성 서비스’를 요구하자, 간식 주며 휴지 주길 거부했던 예의 그 승무원이 말했다. “할머니는 손이 없어요? 어려우면 옆 젊은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해요.” 승무원은 이어 내게도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젊은이, 옆 할머니 좀 도와줘요.”

불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엉겁결에 승무원 지시를 받은 손님이 됐다. 내가 승무원에게 의무 밖 서비스를 요구할 수 없듯, 그 역시 위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게 옆 승객을 도우라는 따위 지시를 해선 안 됐다.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 역시 우리네 감정으로 쉽게 이해는 안 간다. 그래도 한 가지는 두고두고 인상에 남는다. 잘잘못을 떠나 그 승무원이 보여준 노동자로서의 어떤 당당한 태도가 그것이다. 국적기만 이용한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비밀.

익히 알려진 대로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친절의 극단을 보여준다. 승객이 부르면 치마 입고도 무릎 꿇어 눈을 맞춘다. 어떤 주문에도 웃는 낯을 해야 한다. 안 되는 일을 그저 안 된다고 못 한다. 친절이 지나쳐 때로 ‘진상 손님’을 어쩌지 못 해 도리어 얌전한 손님들에게 불편을 끼칠 정도다. 감정노동이란 정의 하나로는 다 설명 못 할 이런 서비스가 어떻게 나왔는지, 최근 폭로된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행태 덕에 비로소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강요된 굴종이었다. 직원의 희생과 눈물로 쌓아올린 비정상 서비스다. 뉴욕타임스는 오너 일가의 ‘갑질’에서 봉건시대 못난 귀족의 행태를 읽었다. 실제 저들의 정신세계에서 회사는 개인 소유 저택이고 직원은 시종이었다. 승객은 저택을 찾은 손님인 셈이다. 시종을 내세워 최선 다해 모시면 자기 체면이 설 것이라 기대한 것일까.

노동자를 노동자로 보지 않으니 회사는 전근대적 지옥이 됐다. 승무원의 화장과 손톱 손질에 일일이 개입하고 이를 고과에 반영한다. 장시간 비행을 하고 돌아와서도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로 가족과 통화 못 하고 커피 한 잔 못 사들고 가게 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서비스가 항공업계의 ‘표준’이 됐다는 거다. 항공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설정 일반에 해악을 끼쳤다. ‘라면 상무’니 ‘기내 난동’이니 하는 하늘 위 일탈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회사가 노동자를 우습게 아는데 승객이라고 다르긴 어렵다. 승무원의 최우선 직무가 객실 안전 관리 말고 다른 데 있지 않을 텐데, 대한항공이 세운 ‘표준’은 다른 항공사의 업무 매뉴얼은 물론 대학교 승무원 관련 학과의 교육과정까지 왜곡했다. 승무원의 안경 착용이 뉴스가 되고, 승무원 지망생이 외국어 학습과 체력관리 보다 ‘미소 짓는 법’을 배우는 게 이런 이유에서다.

오늘(4일) 저녁 대한항공 노동자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다. ‘조양호 일가 및 경영진 퇴진’과 ‘갑질 스톱(STOP)’이 이들이 내건 구호다. 회사로부터 독립된 강한 노동조합조차 없던 그들이 이긴다면 한 못난 오너 일가를 둔 재벌 기업 내부의 일에 그치진 않을 것이다. 저들이 굴종을 넘어 당당한 노동자로 서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나라 다른 일터 노동자들이 모두 늠름하게 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내가 외국 비행기를 타며 느꼈던 불편함과 어색함을 대한항공에서도 느끼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언론에 종사하는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감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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