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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묘향산 보현사와 서산대사

어제(17일) 저녁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기원법회]에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교류에 불교계의 참여를 요청해 관심을 끌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축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지속 가능한 평화의 지혜를 찾는다며 남북 사이의 담을 허물어 자유롭게 왕래하고, 사회·경제·문화 교류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계가 바라는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신계사, 개성 영통사 관련 사업 등 종교적인 교류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신계사, 개성 영통사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북 사업이 진행돼 왔던 곳입니다. 

특히 불교는 국난을 겪을 때 더욱 빛나는 모습을 보였다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는 전국의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일으켰고,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는 전란 후 일본에 건너가 3천여 명의 포로를 데려왔다고 언급했습니다.

대통령 축사에 표현된 내용과 관계있는 불교계의 상황과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묘향산 보현사 전경(좌)과 보현사 만세루(우)
불교계는 최근까지 남북 교류를 위해 당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북한 불교계와도 끊임없이 교류를 추진해왔습니다.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전남 해남/주지 월우)가 묘향산 보현사와 공동으로 서산대제(西山大祭) 봉행을 추진하는 것이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서산대제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끌며 왜군에 맞선 서산대사의 호국충혼을 추모하는 제향(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입니다. 조선 22대 정조가 해남 대흥사 내에 표충사를 세우고, 묘향산 보현사에는 수충사를 지어 추모하도록 하면서 서산대제가 시작됐습니다. 매년 봄· 가을에 제향을 봉행해 왔으나 일제 강점기 때 중단됐습니다. 

보현사는 서산대사가 주석했던 곳, 대흥사는 서산대사 입적 후 의발이 전해진 곳입니다. 대흥사는 지난 2012년부터 서산대사 제향의례집인 표충사 향례홀기(表忠祠 享禮笏記)에 의거해 제향을 복원했습니다. 또 춘계 제향은 대흥사에서, 추계 제향은 보현사에서 봉행하기 위해 북한 조선불교도 연맹과 협의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와 정상회담 추진 등의 남북관계 급진전 속에 이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는 6월쯤 북한 방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 진전에 사업의 성사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보현사 대웅전과 13층 탑
● 묘향산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 있습니다. 묘향산은 한반도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집니다. 서산대사는 일찍이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장엄하지 않고, 지리산은 장엄하지만 빼어나지 않고,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장엄하지도 않고, 묘향산은 장엄하고도 빼어나다고 칭송했습니다. 금강산의 빼어남과 지리산의 장엄함을 모두 갖춘 명산이 묘향산입니다. 묘향산에는 한때 36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 그중에 보현사가 묘향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며, 현존하는 북한 사찰 중에 제일 큰 사찰로 꼽힙니다.

보현사 경내에 있는 보현사비(고려인종 20년/ 1142)에 창건과 관련한 글이 남아 있습니다. 김부식이 쓴 비문에 보현사는 탐밀, 굉확 두 승려에서 비롯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탐밀의 본성은 김씨, 황주군 용흥 사람입니다. 20세에 출가해 한 벌의 가사와 한 벌의 발우만을 지니고 고행했습니다. 매우 춥지 않으면 신발을 신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었으며, 계를 올곧게 지켰습니다. 고려 현종 19년(1028)에 연산(영변)에 들어와 난야(蘭若 : 한적한 수행처, 암자)를 지어서 머물렀습니다. 굉확은 고려 정종 4년(1038)에 탐밀에게 찾아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땅이 모자랄 정도로 학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1042년(정종 8년)에 밀려드는 학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암자로부터 동남쪽으로 100여 보 떨어진 곳에 243칸의 정사를 짓고 보현사라 불렀습니다. <고려사>에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거란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여 산사를 마구 불태워 보현사도 타버리고 불상과 모든 시설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면서 보현사는 예닐곱 차례의 소실과 중창을 반복했습니다.

1912년 전후에 보현사는 [선교양종 대본산묘향산 보현사]라는 이름 아래 전국 30본산 중의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보현사는 대웅전, 명부전, 심검당, 수월당, 명월당, 관음전, 대장전, 수충사, 팔만대장경 보존고 등의 건물이 남아있었습니다. 수충사는 호국승장 서산대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교식 사당입니다.
보현사 내 수충사(좌)와 팔만대장경 보존고(우)
유물로는 북한 문화유물 제 7호 보현사 9층탑, 문화유물 제144호 보현사 팔각십삼층탑이 유명합니다. 또 석가여래사리부도비에는 사리봉안의 내력이 기록돼 있습니다. 통도사에 봉안돼 있던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왜병의 침입으로 해를 입게 되자 사명대사가 금강산으로 봉안했고, 서산대사는 금강산이 바다에 인접해 적국과 가까워 위험하다며 그 가운데 1함(函)은 묘향산에 봉안하고, 1함은 통도사로 되돌려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적이 노리는 것은 사리보다는 금은보화에 있고, 이 땅에 사리를 들여온 자장의 뜻이 통도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사리는 통도사와 보현사에 나누어 보관됐고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비문은 서산대사가 손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산대사 비문
● 서산대사

보현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산대사(1520~1604), 휴정입니다.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호는 청허, 별호는 백화도인, 평안도 안주 출신입니다. 지리산의 화엄동, 칠불동 등을 구경하다가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문에 귀의했습니다.

1549년(명종 4)에 승과에 급제하고, 그 후에 선교 양종 판사가 됐으나, 1556년에 사임하고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편력하며 수행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후 평양, 의주로 피난하던 선조는 묘향산에 머물고 있던 서산대사에게 사신을 보내 구국의 길을 자문했습니다.

70대의 고령이던 서산대사는 전국의 사찰에 격문을 돌려 의승군의 궐기를 호소했습니다. 대사는 순안 법흥사에 머물며 문도 천5백 명으로 승군을 조직하고, 평양 탈환작전에 참가했습니다. 선조가 대사를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며 거절하고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이를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선조는 다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긴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묘향산 안심사, 금강산 유점사에 부도가 있습니다.

● 임진왜란 때 의승군

서산대사의 격문으로 황해도의 의엄, 관동의 사명, 호남의 처영을 비롯해 각지의 승장들이 의승군을 모아 일어났습니다. 충청도에서는 영규가 8백여 의승군을 불러 모았습니다. 영규는 “우리가 분기함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우리 군에 들어오지 말라”며 독려했습니다. 영규의 의승군은 의병장 조헌을 따르는 7백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함락시켰지만, 1592년 8월 금산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 사건은 의승군의 충정과 기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1593년 2월에는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한강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4월에는 한양을 수복했습니다. 의승군은 이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고,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 할 때는 어가의 호송을 맡았습니다. 의승군은 전주사고의 조선왕조 실록과 태조의 어진 등을 강화도, 의주,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가며 안전하게 지켜냈습니다.

전라도 구례 화엄사 주지 설홍은 의승군 300명을 이끌고 호남으로 향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참여했던 경상우도 총섭 신열이 이끄는 의승군은 보리농사를 지어 군량을 비축하는 한편으로 무기를 생산하고 화포 기술을 익혔습니다. 신열의 의승군은 거제 전투에 곽재우 의병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전라 좌수영에는 1592년 9월 400명의 의승군이 5개부대로 이순신의 수군에 편제되었고, 순천의 삼혜는 1594년 여수 흥국사에서 300명의 의승 수군을 주둔하게 하고 지휘했습니다. 벽암 각성은 1593년 사명 유정의 천거로 명의 군대와 함께 해전에 참가했습니다.

사명대사(1544-1610)는 스승 서산대사를 대신해 의승군을 지휘했습니다. 도총섭으로 제수된 서산대사는 강원도에서 8백 명의 의승군을 모아 거병한 후 직접 전투에 참전하고, 산성 구축 같은 후방지원을 주도했습니다. 또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주도한 강화 교섭 도중에 울산에 있던 일본 군 장수 가토 기요마시(가등청정)을 찾아가 적진을 탐색하고 대비책을 상주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동포를 데려 오는 등 외교 사안을 주도적으로 처리한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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