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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일본 '양파 처녀'들의 끝나지 않는 신화

성회용 기자 ares@sbs.co.kr

작성 2018.03.22 15:35 수정 2018.03.26 16:5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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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뒤에 열린 퍼레이드

한산했던 도시가 들썩였다. 일본 홋카이도 기타미 시. 우리에게는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컬링팀 LS기타미(北見)로 갑자기 유명해진 도시다. 21일 낮 기온은 영상 0.3도. 그런데도 만 2천 명이 길거리에 몰려나왔다. 여자 컬링팀 LS기타미팀을 위한 축하 퍼레이드 때문이다.
3월21일 일본 홋카이도 기타미 시내의 환영인파 동계 올림픽이 끝난 뒤 한 달 뒤에 열린 거리행진. 선수들이 올림픽에 이어 다른 대회에 참석하느라 시기가 늦어졌다. 감동이 식을 법도 한데 기타미 시민들의 반응은 남달랐다. 5명 선수들과 코치의 이름을 뜨겁게 연호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보다 더 열정적인 축하가 쏟아져 나왔다.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였다. 선수들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박수와 인사를 건넸다. 카 퍼레이드 구간은 600미터. 추운 날씨에도 선수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30분 동안 연신 손을 흔들었다. 아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다. 5월에 태어나 이름도 사츠키(우리말로 하면 오월이가 된다)인 후지사와 사츠키. 올림픽 경기 때 웃음을 잃지 않아 스마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요시다 치나미. 두 사람의 인기는 연예인 못지않았다. 나머지 선수들과 코치에게도 끊임없이 축하 인사가 전해졌다. 일본 기타미시 전경(출처:기타미시 홈페이지)● 작은 도시 기타미

기타미 시(北見市)는 작고 추운 도시다. 홋카이도에서도 북쪽 오호츠크 해에 붙어 있다. 한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 인구는 11만 9천 명. 일본 기초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길이가 가장 길다. 주력 산업은 일본의 여느 작은 도시와 비슷한 구조다. 농업과 임업, 어업, 관광업. 한때는 천연 박하 생산량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제는 박하 생산량이 얼마 안 된다. 화학적으로 박하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도시도 함께 쇠락했다. 북쪽 바다는 가리비가 유명하고 게도 많이 잡힌다.

현재는 양파가 특산품이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양파 생산량과 가공량을 자랑한다. 양파를 재료로 하는 식품도 다양하게 만든다. 일본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도 기타미가 양파 1등이라는 걸 잘 모르다 이번에 알게 됐다.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마늘의 고장 의성 출신인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 사람들 중에도 기타미 시를 지도에서만 봤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기타미 시가 일본 전국에 유명세를 탔다. 물론 여자 컬링팀 LS기타미 덕분이다.
 
● 세 번의 환영 행사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건 LS기타미의 환영행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선수단이 다 모인 환영행사만 세 번째다.  
 
첫 환영행사는 물론 메달을 목에 걸고 고향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열렸다. 시골인 만큼 평창에서 기타미까지 가는 길도 멀었다. 폐막일 이틀 뒤 한밤중이 돼서야 기타미에 도착했다. 일본 선수단 가운데 가장 늦게 고향 땅을 밟았다. 오밤중에 열린 첫 환영행사는 실내에서 열렸다.
 
“다다이마(다녀왔습니다)”라는 여자 컬링팀 선수들의 인사. 고향사람들은 “오카에리(어서와)”로 화답했다. 선수들은 평창에서 동메달을 따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동안 기타미는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동네가 됐다. 선수들이 간식으로 먹던 치즈 케이크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인기 상품이 됐다. 경기 도중 자주 쓰던 “소다네(그렇네)”라는 사투리는 전국적 유행어가 됐다.
 
두 번째 환영행사는 3월 7일 열린 선수들과 기타미 시장과의 만남. 120년이 넘는 기타미 시 역사. 박하의 영광이 사라진 뒤 특별한 일 없던 시골 도시 기타미. 새로운 도시 개발사업 하나를 추진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예산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선수들과 시장실에 마주 앉은 쓰지 나오타카 시장(65)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38년 동안 기타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정년 퇴직을 했다. 그러다 2015년 전임 시장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보궐선거로 시장에 당선됐다. 기타미 시는 20년 전부터 낡은 시청사를 다시 짓는 문제로 아직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도시다. 인구는 적고 면적은 넓어 주민 전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거리나 기업도 없는 상태다. 그런 기타미시를 5명의 동네 처녀들이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알렸다. 주민들도 한마음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여자컬링팀 선수들을 기다리는 기타미 시민들 (출처: 일본NTV 방송화면 )세 번째 환영행사가 21일 시가행진이었다. 워낙 작고 조용한 도시다 보니 떠들썩한 이벤트가 거의 없었다. 22년 전 통합시 출범 100주년 퍼레이드가 열린 게 마지막이었다. 그런 기타미시에 다시 한 번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도심 한복판이 활기로 넘쳤다. 일본 내 거의 모든 지상파 방송사들의 중계차가 출동했다. 몇몇 방송사는 LS 기타미 팀의 개선 퍼레이드를 전국에 중계했다. 내세울 게 없던 시골 도시에 일본 전국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많은 주민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맙다’를 연발했다. 제대로 된 후원을 못해줘서 안타깝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 열광의 이유

왜 일본 사람들은 LS기타미에 아직까지 열광할까? 아무리 단체경기라고 해도 금메달도 아닌 동메달이다. 그런데 일본 국민들의 관심은 압도적이다.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1. 감동의 스토리

우선 스토리가 있다. 원래 일본은 스토리를 만들지 못해 안달인 나라다. 조금이라도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곧바로 갖다 붙인다. 사람은 물론이고 물건에도 거리에도 스토리들이 넘쳐난다. 

LS기타미 팀의 스토리는 근래에 등장한 스토리들 중에서도 특 A급이다. 양파와 추위 밖에 내세울 게 없는 북쪽의 시골 도시. 좌절한 국가대표의 귀향. 그리고 다시 모인 한 고향 선수들. 활달한 성격에 웃는 얼굴. 아슬아슬한 승부. 덤으로 따라온 결정적 순간의 운. 가장 오래 화면에 노출된 컬링이라는 경기의 특성. 향리에서 들고 간 간식. TV에 큰 목소리로 울려 퍼진 시골 사투리. 어려운 환경에도 꿈을 잃지 않은 선수 개개인의 스토리.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픽 메달을 만들어 냈다. 
출처: LS기타미팀 홈페이지 후지사와 사츠키 선수가 팀 홈페이지에 적은 문장이다. “이 세상에 실패는 없다. 도전하는 동안은 실패가 아니다. 포기하는 순간 실패가 된다.”
 
2. 유토리 세대의 활약

유토리 세대란 말은 일본에서 1987년부터 99년생을 말한다. 유토리는 우리말로 융통성이라는 뜻이다. 유토리 세대는 일본이 전인교육이라는 취지 아래 2003년 조금 느슨한 교육시스템을 도입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자 교육을 세게 받지 않았고 일본의 전통적인 입시 위주 교육과는 결이 다른 교육과정을 거쳤다. 장점도 있었지만 사교육 열풍 등 온갖 부작용이 속출했다. 결국 일본은 2011년 학력 저하를 이유로 이 전인교육 시스템을 폐지했다. 다시 학력 강화 교육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40대 이상 나이 든 일본 사람들은 유토리 세대는 약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 유토리 세대가 맹활약을 했다. 동계올림픽 사상 최대의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언론이 앞장서 ‘유토리 세대도 강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평창 메달리스트들을 부각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여.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보라. 너희들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저들처럼 강해질 수 있다.’ 그 중심에 LS기타미 팀이 있다. 스폰서도 없는 북쪽 시골 도시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올림픽에 도전해 꿈을 이루고 개선했다. 일본 유토리 세대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본보기가 어디 있을까.   
 출처:LS 기타미팀 홈페이지3.지방 창생

지역균형발전을 일본에서는 지방 창생이라고 부른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대도시 이외 지역을 살리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하나가 돼 지역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게 시골이기 때문이다. 시골 젊은이들은 꿈을 펼치기 위해 도시로 떠나간다. 노인만 남은 시골은 조만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 현실을 보란 듯이 뒤집은 게 LS기타미의 올림픽 동메달이다. 선수를 모으기도 힘든 작은 ‘양파’ 본고장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마디로 기적이다. 선수들은 늠름하게 개선해서 ‘고향에 계신 모든 분들 덕분에 메달을 땄다’며 울먹였다. 늙고 힘 없어지는 고향을 다시 뜨겁게 만들었다. LS기타미라는 팀 이름도 지역을 뜻하는 '로컬'과 이탈리어로 '태양'을 뜻하는 솔라레에서 따왔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지역의 태양이 됐다. 일본 최북단 지역의 작은 도시가 일본 컬링의 성지로 변한 것이다. 관광객도 크게 늘었다. 정부와 지자체도 쉽게 해내기 힘든 일을 5명의 여자 컬링팀이 해냈다. 3월21일 기타미시에서  환영인파에 인사하는 LS기타미 선수들● 새로운 전설의 탄생

좋은 스토리는 전설 만들기로 이어진다. 영웅스토리가 곧잘 신화로 이어지는 곳이 일본이다. 늘 새로운 전설을 찾아 헤매는 일본 사회가 또 하나의 훌륭한 재료를 만났다. LS기타미 선수들에게는 현재 광고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에는 못 미쳐도 웬만한 프로골프 선수보다 높은 출연료가 제시되고 있다. 일본 컬링협회가 돈이 없어 포상금을 쌀로 받게 된다는 이야기는 작은 곁가지가 돼버렸다.

준결승에서 치열한 승부를 겨뤘던 한국 '팀킴'과 일본 'LS기타미'. 모두 시골 출신에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대기업의 광고 제의도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여자컬링대표팀인 ‘팀킴’도 최근 대기업 광고에 출연했다. 동시에 컬링 열풍을 선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두 나라 모두 비슷한 양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20대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 도전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다시 재기하는 스포츠 정신.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번 올림픽 스타들을 앞세워 ‘최선을 다하는 승부근성’ 확산을 시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