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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올림피언 장미란과 키다리 아저씨…또 다른 H를 기다리며

이정찬 기자 jaycee@sbs.co.kr

작성 2018.03.05 12:58 수정 2018.03.06 18:2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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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려는 건 올림피언을 도운 '키다리 아저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나자, 올림픽 영웅을 향한 후원 소식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차가운 눈과 얼음 위에 '동계 올림픽 사상 최대 메달'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후원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동계 스포츠 불모지에서 이렇게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또 동계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메달리스트의 ‘노력’만큼이나 후원자의 ‘조력’ 역시 충분히 조명받을 만합니다. 그 조력자 중에 다소 생색내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니 함께 축하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달랐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릉선수촌 역도 훈련장에 한 기업의 마케팅 실장이 찾아옵니다. 그는 '회장님'의 뜻이라며 해당 기업이 만든 갖가지 먹을거리를 두고는 사라졌습니다.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회장님, H는 장미란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해외에서 대회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장미란과 동료 선수들이 배를 채우고도 남을 먹을거리가 배달됐고, 신제품이 나오면 태릉선수촌 역도장에 박스 채 쌓였습니다.
 
얼마 뒤 그 기업은 후원 계약서를 한 장 내밀었습니다. 장미란 선수에게 현금과 현물 지원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요구한 조건은 황당했습니다.
 

"절대 이 계약 사실을 알리지 말 것"

 
보통 스포츠 스타의 후원 조건은 ‘후원사가 주관하는 행사에 몇 회 이상, 몇 시간 이상 참여한다’는 등 스폰서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기업 홍보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반대였던 겁니다.
 
그 기업인은 말했습니다.
 
"나는 먹을거리를 만듭니다. 우리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장미란 선수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억지로 음식을 먹어가며 체중을 늘리려 애쓴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기왕이면 맛있는 음식, 맛있게 잘 먹고 국민께 기쁨을 주시기 바랍니다."
[취재파일]올림피언 장미란과 키다리 아저씨…또 다른 H를 기다리며-장미란장미란이 베이징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숨은 조력자들이 하나둘씩 밝혀졌지만 끝내 이 기업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장미란은 몇 차례 인터뷰에서 고마움을 밝히고자 했지만 이마저 그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세계 누구도 들지 못한 무게를 들어 올린 장미란 선수이지 내가 아닙니다. 정 보답하고 싶거든, 가끔 이렇게 만나 우리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합시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장미란 선수와 그의 아버지 장호철씨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이듬해 고양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부녀는 특별한 수건을 준비했습니다. 대기 시간 몸에 두르는 수건에 해당 기업 이름을 새겨서 드러나도록 한 겁니다. 이 수건과 함께 장미란은 용상에서 또 한 차례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정상을 지켜냅니다.
 
두 사람은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하자던 약속은 계속 지킬 수 없게 됐습니다. H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H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둘의 약속은 알려지지 않았고, 그 기업은 여전히 장미란 선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미란 재단에 후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 할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알리는 것이 고인의 뜻에 반하는 것이어서 고민이 컸습니다. 미국 유학 중인 장미란 이사장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장 이사장은 "판단이 안 선다"고 답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시작한 이유는 여전히 많은 올림피언들이 후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컬링은 평창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이 가장 즐겁게 본 종목으로 꼽혔지만 현실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현재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주니어선수권에 나선 우리 여자 선수들은 지난달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이들을 받아줄 대학도 실업도 마땅치 않습니다. 지난해 평창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소치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경기도팀, 평창올림픽에서 사상 첫 은메달을 목에 건 ‘팀 킴’을 꺾고 우승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이들이 목표한 ‘베이징 올림픽 출전’의 꿈은 물거품이 될 위기입니다.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줬던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여전히 돌아갈 소속 팀이 없습니다.
피겨 아이스 댄스 민유라-겜린 선수피겨 아이스댄스의 민유라와 겜린처럼 따뜻한 후원의 손길 덕분에 꿈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회장처럼 숨어서 올림피언을 후원하는 일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간다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꿈을 진심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우리 선수들은 늘 그랬듯 커다란 감동으로 보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