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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한민국 특허 법정에 특허는 있나?"

'콤마 심결문'에 전문가 증언도 무력화

[취재파일] "대한민국 특허 법정에 특허는 있나?"
● 또 좌절된 다윗의 도전

지난 1월 19일 오후 대전광역시 둔산동의 특허법원 대법정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방청객들이 밀려들었다. 38석의 자리는 모두 찼고, 10여 명은 서서 방청해야 했다. 15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소기업 서오텔레콤과 대기업 LG유플러스의 특허 분쟁 결과를 보러온 사람들이다.

방청객들 대부분은 중소기업 관계자들로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제 대기업 '골리앗'에 맞서 싸운 중소기업 '다윗'의 승전보가 울려 퍼질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국제통신표준 CDMA를 상용화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박사가 전문가 증인으로 나서 "서오텔레콤의 주장이 맞고, LG유플러스의 주장은 국제통신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에 선고가 예정된 재판은 서오텔레콤 건을 포함해서 모두 6건이었다. 3명의 판사 가운데 대표인 재판장은 서오텔레콤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5건의 재판에 대해서는 재판의 결과를 적은 주문만 간단하게 낭독했다.

여섯 번째, 서오텔레콤과 LG유플러스의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처리장치와 그 방법'에 대한 권리범위 확인심판에 대한 선고 차례가 오자 재판장은 많은 방청객에 서비스라도 하듯 먼저 판결의 경과를 장황하게 읽어 내려갔다. 우호적인 재판진행에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던 방청객들의 표정은 그러나 갈수록 굳어졌다.

재판장이 마지막에 읽은 항소심 결과는 "1. 원고(서오텔레콤)의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였다. LG유플러스의 휴대전화를 이용한 긴급구조요청 시스템 '알라딘 서비스'가 서오텔레콤의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처리장치'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특허심판원의 1심 심결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99% 승소를 예상했다는 서오텔레콤 김성수 대표는 특허법원의 패소 판결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재판정에서의 전문가 증언도 무시되는 재판이 무슨 재판이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한민국 특허법원의 판결 방식에 특허라도 내야 할 판이다. 대한민국 특허법원에 특허는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서오텔레콤 긴급호출 시스템 구성도
● "업무협의 하고 동의 없이 알라딘 서비스 출시"

지난 2001년 9월 서오텔레콤이 출원해 2003년 3월 등록된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처리장치와 그 방법' 특허는 비상상황에 처한 사람(위난자)이 휴대전화의 측면에 있는 사이드 버튼을 3초 이상 누르면 미리 입력해 놓은 연락처(보호자)로 '구조요청 문자'가 전송되고, 위치추적과 함께 도청 모드가 작동해 위난자가 처한 긴박한 현장 상황이 그대로 생중계되는 간단하지만 획기적인 발명이다.
서오텔레콤과 LG의 업무협의 일지
이 특허기술을 알게 된 LG 전자는 2002년과 2003년 서오텔레콤 김성수 대표를 불러 기술설명과 함께 자료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2004년 초 서오텔레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서오의 특허기술과 같은 개념을 구현한 알라딘 폰을 만들어 LG텔레콤을 통해 판매했다. 강력 사건이 빈발하던 당시 알라딘 폰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특허를 도용했다는 서오텔레콤 측의 문제 제기에 보상 협상을 진행하던 LG그룹 법무팀은 돌연 협상을 중단했고, 이렇게 시작된 서오텔레콤과 LG유플러스의 특허 소송전은 15년째 이어지고 있다.
 
▲ 서오텔레콤 응급구조콜 시스템 소개

15년 동안 이어진 특허 소송에서 특허심판원과 법원이 LG유플러스가 특허침해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두 응급구조 시스템의 구동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특허명세서의 문구를 해석한 결과 "LG유플러스의 알라딘 서비스가 위험에 처한 위난자가 구조요청을 하는 방식인 반면, 서오텔레콤의 특허는 비상연락을 받은 비상연락처(보호자)가 주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심결을 담당했던 특허심판원의 심의관과 재판을 담당했던 법원의 판사들은 특허명세서의 특허청구조항에 적힌 콤마(,)와 비상호출 처리장치 개념도에 나온 '호설정 요구'라는 용어를 볼 때 두 시스템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서오텔레콤 특허명세서 구성요소 4
서울고등법원 콤마 심결문 (2010.08.19)
● 특허 재판에 등장한 '콤마심결문'

특허소송이 7년째 이어지던 지난 2008년 8월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는 "서오텔레콤의 특허명세서 구성요소 4에 '비상연락처로부터의 비상발신에 따라'라고 기재하고 있고, 중간의 '콤마(,)'를 기준으로 문장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어 '비상연락처로부터의 비상발신'은 비상연락처가 주체로 된 '별도의 발신행위'로 봄이 타당하다."라고 판시했다. 이름도 생소한 '콤마 심결문'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서오텔레콤의 발명이 위급상황에 처한 사람(위난자)이 주체가 된 구조요청 시스템이 아니라, 비상연락처상 보호자가 주체가 된 시스템이어서 LG유플러스의 시스템과 다르니 특허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다. 서오텔레콤 측이 "발명의 의도나 통신업계의 기술표준과 관계없이 재판부가 자의적 판단을 했다."고 반발하는 대목이다.

지난 2011년 5월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해 서오텔레콤의 상고를 기각했다.
서오텔레콤 응급구조콜 개념도
서울고등법원이 또 하나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비상연락처로부터의 비상발신'은 서오텔레콤의 응급구조콜 개념도상 S22 단계에 있는 '호설정 요구'다. 법원은 위급상황에 처한 사람이 측면의 비상버튼을 눌러 구조요청 전화를 하면 비상연락처에서 이를 받는 행위인 '호설정 요구'라는 표현을, 전화를 끊고 다시 거는 '새로운 발신행위'로 본 것이다. 서오텔레콤 측이 '전화를 받는 행위를 새로운 발신 행위로 봤다.'면서 "이동통신 기술의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고 반발하는 대목이다.

● "세계적인 통신 전문 연구기관 ETRI는 무시됐다"

논란이 계속되자 청와대는 지난 2013년 2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의뢰해 쟁점 사항에 대한 기술적 판단을 받아 볼 것을 당시 지식경제부에 지시했다. 법원이 판단한 대로 응급구조 콜이 진행되는 동안 전화를 끊고 다시 거는 것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타당한지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동통신기술의 국제표준이 된 CDMA를 상용화한 ETRI는 이에 대해 '이동 통신단말기와 비상연락처간에 이미 형성된 통신회선이 유지됨으로, 비상연락처에 의한 호 접속으로 새로운 통화 채널의 형성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기술검토보고서를 산업통상자원부에 보냈다. "통화 채널이 한 번 형성되면, 이 채널로 비상연락처와 위난자의 단말기 사이에 통신이 계속 이루어짐으로 추가 채널의 형성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설명이다.
ETRI 기술검토보고서 中 (2013.03.19)
하지만 서오텔레콤과 LG유플러스의 특허범위 확인소송 1심 판결을 맡았던 특허심판원 제8부는 지난해 4월 'ETRI의 기술검토 의견은 특허발명의 명세서 및 도면 전반을 살펴 고려한 종합적인 의견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 제시로 파악된다.'며, '비상연락처로부터의 비상발신'은 새로운 호접속이다.'라고 심결했다. 2008년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이른바 '콤마 심결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세계 최고의 통신전문가들이 낸 검토 보고서는 '개념도만 보고 낸 단순한 의견제시'라고 깎아내린 것이다.
특허심판원 심결문 (2017.04.11)
논란이 가열되자 항소심을 맡은 특허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전문가 증인을 채택했다. 전문가 증인은 ETRI에서 CDMA 기술을 연구하는 박현서 박사였다. 박 박사는 지난 지난해 12월 8일 특허법원 법정에 나와 "통화 채널이 형성된 후 비상연락처로부터의 새로운 호접속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특허명세서에 있는 '새로운 호접속'과 개념도에 나타난 '호설정 요구'는 전화를 거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계속되는 판사의 질의에 박현서 박사는 3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증언했다.
박현서 박사 증언 녹취록 (2017.12.08)
하지만 특허법원은 지난 1월 19일 선고 공판에서 ETRI에서 제출한 기술검토보고서와 박현서 박사의 증언을 반대로 해석했다. 특허법원은 "도면 22단계의 '호설정 요구'는 이동통신시스템의 작동과정에서 나오는 '접속메시지(Connection Message)'라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박현서 박사의 증언과 증거자료들을 종합할 때 특허명세서에 있는 '비상발신'이나 개념도에 나타난 'S22 단계의 호설정 요구'는 새로운 발신행위 또는 새로운 호접속 요구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특허법원 판결문 (2018.01.19)
서오텔레콤 측은 "특허법원이 'ETRI의 기술검토보고서와 박현서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판결했다'면서도, 증언이나 증거자료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반발하고 있다.

● 특허보다 재판이 중요…"특허법원에 특허는 없다"

15년째 특허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서오텔레콤은 지난 9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증거자료와 증언에 대한 심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증거채택도 잘못되었으며, 법리를 오해했고, '명세서에 없는 데도 응급 콜 시스템 작동과정에서 통화가 끊어진다.'며 특허 명세서를 확대해석했다는 주장이다.

서오텔레콤의 김성수 대표는 "사실관계가 명백한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면서 대법원 판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벌인 국내 특허소송에서 최종적으로 이긴 사례는 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특허청의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2009~2013년 5년 동안 있었던 중소기업의 대기업 상대 특허소송에서 중소기업의 1심 패소율은 89.9%에 달했다. 항소심 격인 특허법원까지 올라간 사건 20건 중에서는 중소기업이 승소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다.

대기업 주도의 사법 생태계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재판에서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허관련 전문단체나 변호사, 변리사, 학계, 심지어 공무원들도 대기업과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이른바 '돈이 되지 않는 중소기업의 특허문제'는 외면한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특허법정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얘기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 신화를 창조한 '히딩크 리더십'은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면 얼마나 큰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히딩크 감독이 없었다면 박지성, 이영표, 안정환 등 월드컵 스타들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조직이나 집단은 팀워크를 발휘할 수 없고, 개개인의 역량은 오히려 퇴보하는 황폐한 조직이 되고 만다.   
공정한 특허 심판을 촉구하는 중소기업인들
법은 사회적 약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공평한 법 집행은 개인의 창의성을 보장하고, 기득권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생태계를 보정해 가속화하고 있는 양극화와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급속한 고령화에 활력을 잃고 있는 대한민국의 황폐한 경제 생태계를 복원하고, 국가적인 생동감을 부활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의 묘약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개인의 창의에 바탕은 둔 발명과 신기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발명을 보호 장려하고 그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특허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특허법정은 재판관들의 주관과 시각보다는 보편적 기술과 과학이 인정되는 합리적인 재판정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계도 만연한 흉악 범죄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꽃을 피우고, 세계적인 통신연구기관 ETRI의 기술검토 보고서와 최고 통신전문가의 증언이 '특허논리'보다는 '재판논리'에 의해 사장되지 않도록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처리장치'에 대한 기술검증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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