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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절벽에서 떨어지면 국가 책임인가 개인 책임인가?

정쟁의 수단 된 '국가책임론'…국가 책임 어디까지

[취재파일] 절벽에서 떨어지면 국가 책임인가 개인 책임인가?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논설위원 斷想]
외국 여행 중에 아주 유명한 관광지의 절벽 위에 서 본 적이 있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높이에서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던 중, 옆에서 한국인 관광객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안전 철책이 없네. 여기서 실수로 떨어지면 이 나라 정부가 책임지는 거야?"

무심코 들은 이야기지만, 마음 한편에선 한국인 특유의 '국가관'이 느껴지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외국 유수의 트레킹 코스나 경관 지구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철책같은 인위적 보호장치가 거의 없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본인 부주의로 떨어질 경우에, 국가가 철책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죽음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생각의 근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비슷한 맥락을 느낄 수 있는 한 외국인 지인의 질문이 떠오른다. "한국에선 큰 사고나 기상 재해 때문에 피해가 났을 경우에, 모두 정부가 보상해주느냐?"는 물음이었다. 더불어 "한국인들은 화재나 농작물 보험 같은 스스로를 지켜줄 보험을 잘 들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도 말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대형 사고 때마다 피해자들이 정부를 향해 아우성치고, 거기에 정부는 국가 잘못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지원을 약속하는 모습이 다소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 그의 말대로 대형 사고 현장, 심지어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천재지변에도 "정부가 뭐했느냐?"는 고함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니까, "왜 저걸 정부가 책임져야 하지?"라며 의문을 갖던 국민들마저 종국에는 동화된다.

정말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국가는 법과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잘 운영해야 할 책무를 진다. 그리고 그 규칙 안에서 국민과 기업을 비롯한 국가 구성원들이 잘하면 보상하고 못 하면 법에 따라 책임을 지운다.

통치 시스템이 잘못 설계되고, 그것의 수행과 관리를 잘못한 책임은 당연히 국가가 져야 하지만, 국민을 비롯한 국가 구성원들의 개인적 일탈에 대해서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정치적 인기와 선거 승리를 노리는 포퓰리즘인 동시에, 국가 구성원들에겐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밀양 화재 현장 방문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여야 간의 대형 사고를 둘러싼 국가 책임론 논쟁을 보면서 정치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지 극명하게 느끼게 된다.

정확한 사고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야당은 잇따른 사고의 책임이 정부 여당 책임, 나아가 국가의 책임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고, 이에 맞서 여당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밀양 사고 지역의 직전 행정 책임자였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여당 입장에선 과거 야당 시절에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했었고,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낚싯배 사고를 국가 책임으로 규정한 부분이 있기에, 이런 공세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질 법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정 시대나 절대 왕정 시대엔 절대 리더가 큰 재난의 책임을 모두 감싸 안는 모습을 보였다. 가뭄이 심해서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면, 왕들은 "모든 것이 짐의 부덕 때문이다."라며 기우제를 지냈다. 그때는 왕이 곧 국가였고 신의 대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정부 여당은 법치주의에 의거해 권력을 잡고 법에 따라 통치하는 집행자일 뿐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인이 아니기에 당연히 모든 책임이 내게 있다며 나설 필요도 의무도 없다.

모든 사고를 정부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쪽이나, 그런 빌미를 제공한 쪽이나 더 이상 국민을 호도하는 정쟁을 그쳐야 한다.

겉으로 듣기 좋고 비판하기 좋은 거창한 국가 책임론 이면에서, 여전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소외되고 고통 받으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네 책임이고 내 책임이고 하면서 다투기 이전에, 당연히 책임질 것부터 책임지는 정치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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