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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박대영 기자 cyumin@sbs.co.kr

작성 2018.01.09 11:31 수정 2018.01.09 11:32 조회 재생수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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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서북각루 아래로 펼쳐진 갈대의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는 저 너머로 수원화성의 서문(西門)인 화서문(華西門)이 보인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 문으로,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아 올린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이 특이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이중 구조의 방어막을 형성한 것인데, 이는 서울 도성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도 볼 수 없는 수원화성만의 특별한 구조라고 한다. 후대의 발전된 축성 기술과 군사 전략적인 발전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옹성과 성문의 이중적인 구조는 수비적인 측면에서 훨씬 견고해 보인다.
사진 좌측의 멀리 보이는 건물이 서북공심돈이다.게다가 화서문 옆에 자리 잡은 높다란 네모반듯한 건물 역시 궁금증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다. 구운 벽돌로 지은 모습이 유럽의 성에서 볼 수 있는 성탑(城塔)을 연상시킨다. 이 건축물의 이름은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망루와 초소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하니 아마도 성탑과 그 역할은 비슷했으리라.
화서문 위에서 본 서북공심돈설명에 따르면, 공심돈은 성문의 옹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여 수원화성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화서문과 나란히 서 있으면서 화서문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군사 시설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강화도의 돈대(墩臺)와 마찬가지로 결사항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 역할까지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그런데 성 밖에서 성을 올려다보면 이 서북공심돈이 기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성곽의 스카이라인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곽하면 떠오르는 단편적이고 평면의 이미지에 공심돈이 입체감을 주고 있다고나 할까. 여하튼 현대의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화롭고 나름의 멋이 느껴진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정조의 탕평책은 성공하였는가?

화서문의 현판 글씨는 화성 축조의 책임자이자,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의 글씨라고 한다.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로,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그의 아들인 세손의 스승이면서 후견인이었던 인물이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영조에 의해 세자를 폐위시키자는 비망기가 내려졌을 당시,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킨 바도 있었다. 이 일로 후에 영조가 정조에게 이르기를,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채제공은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세손의 명실상부한 후견인이었다.

그랬던 그였으니, 정조 즉위 후에 중용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즉위 초 정조 시대의 실질적인 권력자이자, 세도 정치의 서막을 연 홍국영과의 불화로 잠시 낙향하기도 하였으나, 홍국영의 실각 후 정조 말년까지 재상으로써 정조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또 한편으론 노론에 대응하는 정조 시대 탕평책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여기서 잠시, 그렇다면 정조의 탕평책은 성공적이었을까?

사실 어떤 정책을 평가함에 있어 양단간에 똑 부러지는 정답이야 있을 수 있겠는가마는, 정조의 탕평책은 우리가 흔히 영·정조 시대를 일컬어 탕평의 시대라고 듣고 배운 것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붕당 간의 정쟁을 조정 내지 이용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실제 영조는 경종의 사후 노론에 의해 선택된 왕이다. 경종 생전에도 노론은 끊임없이 경종이 병약함을 핑계로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노론 세력이었기에 소론 세력과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은 당연했고, 결국 경종의 독살설과 같은 온갖 추문 끝에 영조를 용상에 앉힐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조에게 노론은 정치적 동반자이자,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그런 이유로 영조는 당연히 즉위 후 소론을 일소하고, 노론 정권을 수립한다. 하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속성을 가지는지라 영조는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체감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신하 권력을 축소하는 것이다. 권력을 축소하는 방법은 나누고, 경쟁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탕평책이 갖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물론 숙종 시절의 지나친 당쟁에 신물이 난 영조가 선택한 정치 발전을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탕평책을 통해 일당 독재에서 다당제로 전환됨으로써, 신하 권력은 분산되었고, 서로 선택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저절로 왕권이 강화되는 묘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영조는 노론과 소론으로 대표되는 당파에 속하지만, 그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번갈아 기용하는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멀고 먼 탕평의 길

하지만 영조가 내건 진정한 탕평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고만 것이다. 소론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노론은 사도세자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잡은 정권인데 그렇게 쉽사리 내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라도 사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다. 수렴청정 중인 저군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노론은 사도세자와 그 세자가 탐탁지 않던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8일 후 사도세자는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고 만다. 노론의 승리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정치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탕평은 이름 뿐, 시스템으로 정착되기에는 각 정파의 투쟁은 격렬했고, 왕은 그 정파를 초월하지 못했던 것이다.

탕평을 포함한 정치 체제의 변화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정치적 안정과 발전, 나아가 국가 발전을 통해 백성의 나은 삶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뿌리를 버리지도, 속이지도 못했다.

영조 역시 그의 뿌리는 노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왕실을 장악한 외척들 역시 노론 일색이었다. 영조 자신의 처가와 사돈 모두가 노론이었다. 사도세자는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영조와 정순왕후, 그리고 생모인 영빈 이 씨, 나아가 마누라인 혜경궁 홍 씨의 직간접인 개입과 외면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신분이 미천했던 영빈 이 씨를 제외한 그들 모두는 골수 노론이었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정조가 노론을 내치지 못한 이유

뒤이어 즉위한 정조에게 노론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노론은 아비인 사도세자를 무참하게 죽인 세력이었으며, 자신이 왕이 되는 앞길을 사생결단으로 막아섰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후 정조가 맞닥뜨린 당면 과제는 대리청정 하는 세자를 죽인 증오의 정치와의 결별, 그리고 신하의 나라가 아닌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백성의 나라를 세우는 것, 노론만이 존재하는 일당 독재 체제의 진정한 종식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적폐의 뿌리는 노론이었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노론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자들은 병자호란 이래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청나라에 조공하면서도 뒤로는 궁궐 내에 명나라 황제를 섬기는 사당을 두고 참배했으며, 스스로 조선을 제후국이라 여겨 조선의 왕을 중국의 일개 제후로 여겼으니,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이들의 제거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그러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정조의 어중간한 위치, 즉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딜레마가 주요한 이유였다. 아버지를 높이자니 할아버지를 배신하는 결과가 되는 상황에서 정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영조는 특별히 정조에게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지까지 내린 터였다. 그런 이유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원흉들을 처단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거기에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와 할머니 격인 정순왕후 김 씨 역시 정조에게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성리학적 유교의 으뜸이 되는 가치가 효(孝)였으니. 이 두 여인이 버티는 한 노론 척결은 요원했던 것이다. 이 두 여인이야 말로 노론의 대표적인 방어막이자, 후견인이었다. 당시 노론을 척결한다는 것은 이들을 대표하는 벽파와 시파의 수장이자, 두 왕비의 아비인 홍봉한과 김한구를 위시한 그 가문을 처단함을 의미했으나, 두 왕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막아섰던 것이다.
정조의 국화도
● 노론 당인으로서의 정조와 그의 시대의 한계

그리고 정조 스스로의 당색도 노론이었다. 그가 주창한 성리학적 왕도 건설은 노론이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하였던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의 대유(大儒)라 여기며, 임금이자 스승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뚫고 나가야 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 도리어 갇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게다가 정조는 노론 당파의 종조(宗祖)격인 우암 송시열을 공자,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로 높이며, 문묘에 배향하는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였고, 이는 성리학의 계승자이자,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노론의 무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에 기반하고 있던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실시한 탕평책은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함으로써 정치체제를 안정화시키고, 국가와 왕실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원론적인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실제로는 탕평책이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으로 흐르면서, 새로운 정치의 시스템 마련이라는 궁극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나름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숙종이 남발하였던 수많은 죽음을 볼모로 하는 환국(換局,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당을 수시로 교체하는 통치방법) 정치가 아닌, 그나마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는 점과 형식적으로는 남인들과 서얼 출신들을 중용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점은 평가받을 수 있으나, 거기까지였다. 규장각의 그들은 권력 핵심에 있지 아니 하였고, 권력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가문과 엘리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된 통치 및 정치 시스템은 마련되지 못하였고, 정조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구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은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갖는 문제점이자 한계는 든든한 사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왕의 죽음이 곧 제국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정조 사후의 조선이 그러했다.

정조 사후 조선은 급격하게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스스로 당시 주도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견제하고자 고르고 골라 사돈으로 맺은 노론 시파의 수장이었던 김조순과 그 가문이었다. 안동 김 씨 가문이 바로 그들이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정조는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바탕으로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아 성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가 갖는 또 다른 역사적 위치는 그나마 온전했던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후 조선은 급전직하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으니, 그 역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멸망 조선의 시작은 그의 아들인 순조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마지막 호흡을 붙든 연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북서포루의 모습● 장안문(長安門) 이름에 담긴 뜻

화서문을 지나면 길은 평지길이다.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라 그다지 특별함은 덜하다.

다만 중간 중간에 만나는 초소 같은 건물들이 오가는 이에게 아는 체를 한다. 무슨 사당 같이 보이는 모습의 건물이 보인다. 북서포루(北西砲樓)다. 포루(砲樓)는 성벽 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 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라고 한다. 은폐 엄폐된 포대였던 것이다. 포대치고는 건물의 모습이 고색창연하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얼마 가지 않아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행인을 반긴다. 아마도 이 나무만큼은 성곽과 성곽 안에서 삶을 영위했을 무수한 민초들의 기쁨과 애환을 지켜보았을 듯도 싶다. 초목만 의구(依舊)하고, 인걸(人傑)은 가고 없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北門)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수원화성에서만큼은 북문이 정문이다. 이는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이 북문인 까닭에 북문을 정문으로 정했다고 한다. 장안문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長安城)처럼 화성 역시 융성하고 번창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장안문의 모습특히 장안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수도였고, 당나라 때에는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중국 문명의 세계 전파를 위한 전초기지였으니, 그 이름에 담겨 있는 뜻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수원화성 축성 모습 모형. 거중기가 보인다.● 인간의 삶에 기여하라. 정약용의 거중기

수원화성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발명하여 축성 공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곽길 한편에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를 이용해 축성하는 백성들의 모형이 있어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새삼 거중기가 없었다면 그 무거운 돌들을 옮겨 성을 쌓았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노고는 얼마나 더 심했을고.

오지랖이 넓어서인지, 실제 해외여행이나 출장 중에 만나는 고대나 중세의 건축물을 보면서 저 건축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 눈물이 스며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유럽의 성이나 성당 같은 건축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변변한 장비도 없이 저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덩어리들을 어떻게 저 높이까지 올렸을 것이며, 또 도대체 저 돌덩이들은 어디서 가져다가 저 건축물을 세웠단 말인가. 내가 그 작업장에서 돌덩이를 지고 있기라도 하는 양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한 게 여러 번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야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그들에게 저 건축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더란 말인가. 그렇게 그 바윗덩이 아래에서 숨져간 수많은 이들의 영혼들이 아직도 그 건축물을 떠받치고 있기라도 하는 양 몸서리를 치기도 했었다.

정약용의 거중기는 성곽을 쌓는 효율성의 문제이기 전에, 수많은 목숨을 구한 생명의 장비였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성곽을 구성하는 그 수많은 돌덩이를 어깨에 얹고 아스라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던 그들에게 거중기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 것인가. 이처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함에도 가끔은 기술이 인간을 착취하거나 대체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이 새삼 안타깝고 또 두려워진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겨울이 온다는 것, 그리고 나이 듦의 의미

성벽을 뚫어 화포나 총기를 내어 쏘게 만든 총안(銃眼) 틈새로 아직도 남아 있는 지난 계절의 흔적들이 화사하다. 머지않은 때에 사라질 풍경이라 그런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가끔은 쓸데없는 감정의 과잉이 어색하고 또 불편하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새삼 멀리 있는 막연한 소중함보다는 곁에 있는 소박한 나의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그렇게 나이 듦을 느낀다. 누군가는 늙어가는 증거라고도 하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늙어감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행복은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고, 세상은 이래야 하고 나는 이래야 된다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세상을 똑바로 보고, 그렇게 내 스스로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날, 행복은 내 안에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갈 길은 멀다.
화홍문과 동북각루화홍문과 7개의 홍예● 무지개가 되어라, 화홍문

멀리 성곽의 높은 곳에 우뚝 솟은 화홍문(華虹門)이 보인다. 화홍문은 성의 북수문(北水門)이다. 화홍문은 이름처럼 광교산에서 발원해 성안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수원천 위에 지어진 수문이다. 누각 아래의 홍예(虹霓, 아치 형태의 동양적 건축기법)는 커다란 댐의 수문마냥 금방이라도 물줄기를 왈칵 쏟아낼 것만 같다. 화홍(華虹)이라는 이름마저도 '화성의 무지갯빛'이니 수문을 벗어난 물줄기의 파편들이 터지며 만들어낸 무지개에서 얻은 이름이 아니던가.
화홍문의 야경 (사진=수원시청 제공)
아니나 다를까. 화홍문의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는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불리며, 수원8경 중 하나라니 그 기대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오히려 뿌듯하다.
화홍문의 편액편액에 걸려 있는 화홍문이라는 글씨체마저도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연상하여 물이 흐르는 모습처럼 유려하게 썼다고 하니, 화홍문의 주인은 누각이 아니라 수원천의 물줄기였던 셈이다.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저 멀리 동북각루가 보인다.

화홍문을 지난 길은 언덕 위로 향한다. 언덕 위 용머리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화성의 건축물 중 으뜸이라는 동북각루(東北角樓)가 자리 잡고 있다.

어여 가보자. 잘 정비된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 위로 초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동북각루의 야경. (사진=수원시청 제공)<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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