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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평범한 책의 비범한 성취

<언어의 온도>는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

[취재파일] 평범한 책의 비범한 성취
천만 관객 영화라고 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모두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그래서 기자는 평소 천만 관객 영화와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차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궁금했다. 마음을 흔들거나 눈길을 끌 만한 내용이 없는, 그저 잔잔하고 밋밋한 책인데 어떻게 올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이 궁금증은 이 책의 저력을 알아보지 못한 아둔함에 대한 자책에서 시작됐다.

기자가 <언어의 온도>를 처음 발견한 것은 올해 초 한 대형서점을 찾았을 때였다. 보라색의 문고판으로 된 특이한 디자인의 책이 진열대에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집어 들었는데, 슬쩍 훑어보고 든 생각은 "내용은 그냥 평범한데?"였다.

개성있는 디자인과 대조적으로, 책의 내용은 일상의 평범한 생각과 감성을 그저 매끄러운 문장으로 다듬은 책처럼 읽혔다. 지하철에서 만난 노부부 얘기, 친구의 결혼식 얘기, 그리고 그날 본 영화 얘기 등등. 소소하고 평범했다. 

작가에 대한 소개를 찾아봤으나 당시에는 유명작가가 아닌 <이기주>라는 이름과 함께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쓴다"는 짧은 글만 적혀 있었다.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좀 있으면 사라지겠군."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서점에 갈 때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 상단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올해의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언어의 온도>가 차지했다는 교보문고와 예스24의 도서 집계가 나왔다.

● <언어의 온도>, 2107년 베스트셀러 종합 1위

<언어의 온도>는 작년 8월에 나온 책이다. 처음 출간됐을 때는 언론의 책 소개도 없었고 평론가의 눈길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히 몇 달을 보낸 후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출간 6개월만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 책은 <82년생 김지영> <자존감 수업>과 함께 '역주행'을 올해 도서시장 키워드로 만든 주역으로 꼽힌다.
언어의 온도
기자는 올해의 베스트셀러를 확인한 후 <언어의 온도>를 새로 읽어봤다. 처음에 놓친 게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점이나 비결을 찾아보려는 긍정적 탐색의 시각으로 다시 찬찬히 읽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처음의 인상이 바뀌지 않았다.

이 책의 글들은 따뜻하고 소소하며 편안하다. 반면에 번뜩이는 통찰이나 특별한 경험은 찾을 수 없다.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그 주제를 관통하는 체계적인 탐색이나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언론이 기사를 쓰지 않은 이유가 짐작된다. 내용이든, 필자든 뭔가 주목할만한 요소가 있어야 기사를 쓸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기삿거리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은 착하고 잘생긴 모범생 같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어머니의 화장대에 몰래 꽃을 올려놓는' 효자다. 요즘 보기 드문, 고전적 스타일이다. 먼저 이 모범생이 풀어놓는 얘기들을 조금 살펴보자.

저자는 버스나 지하철에 타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곤 한다며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 노부부의 대화 등에서 따뜻한 언어의 온도를 감지한다.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더 아픈 사람)


저자는 어머니의 옛 친구를 찾기 위해 회사에 월차를 내고 수소문에 나섰다. 마침내 재회가 이뤄졌을 때 오래된 것의 가치를 확인한다.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잡기 위해
애쓸 때보다, ‘한때 곁에 머문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되찾을 때 우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더 오랜 기간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일상의 모든 경험이 성찰로 이어진다. 제주도 여행길에 폭설을 만나 멈춤과 쉼의 의미를 음미한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88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 책은 결론도 에필로그도 없이 쿨하게 마무리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출근길에 발견한 들꽃의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이 책에 대한 온라인 독자평은 수천건을 넘어서서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평이 많은 가운데 회의적인 평가를 남긴 독자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 따뜻하다 VS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먼저, 따뜻하고 읽기가 쉬워 좋았다는 반응이 가장 많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블로그에 퍼다 놓은 사람도 많았다. 호평을 한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이 책은 한꺼번에 읽어 내리기 보다는 조금씩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망스러웠다는 평가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베스트셀러라고 무조건 사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책이다.”
“독서모임에서 읽고 얘기를 했는데 왜 이 책이 인기가 많을까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아서 놀랬다.”

이 책은 독자가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따라 특히 다양한 반응이 나올 만한 책이다. 만일 편안한 휴식과 힐링을 원한다면 이 책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원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오한 통찰이나 변화를 위한 따끔한 충고를 원한다면 이 책에서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의 평가다.

이렇게 독자에 따라서 평이 갈리는 책이 어떻게 해서 2017년 독서시장을 석권하는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 활자중독자의 순례행위

출판계에서도 언어의 온도의 인기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많은 것 같다. 편집자들은 먼저 이 책의 독특한 마케팅에 주목한다.

이기주 작가는 기자생활을 몇 년 한 뒤 1인 출판사를 열고 언어의 온도를 썼다. 책을 출간한 뒤에는 넉 달 동안 혼자 전국 일주를 하면서 주요 서점을 탐방했다. 서점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온라인 마케팅에도 열심이었다. SNS에 자기 책에 대한 글이 있으면 부지런히 댓글을 달았다고 한다. 책 머리에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고 자기를 소개한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활자중독이라고 규정한다.

“아직 활자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책을 펴낸 다음 서점을 찾아
책이 머무는 장소를 답사하고
책의 운명을 가늠하는 일은,
일종의 순례행위가 돼 버렸다”


베스트셀러의 탄생에는 마케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에 광고를 내고, 대형서점에서 잘 보이는 곳에 집중적으로 진열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책이 언급되거나, 문화권력을 가진 유명인이 추천하기라도 하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내용이 받쳐주지 않으면 반짝 주목을 넘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는 없다. <언어의 온도>가 유명인의  추천이나 신문광고, 언론의 주목, 저자의 유명세도 없이 올해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활자중독 저자의 '순례행위'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내용 속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단문의 시대'에 맞는 글이라는 점을 꼽는다. "단문의 시대, SNS에 올리기 쉬운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요즘 트렌드와 맞는 것 같다. 내용면에서도 어렵고 부담스런 주제보다는 편안하고 가볍게 읽기가 좋다는 점이 젊은 층에 통했다"고 평가한다.

● 단문의 시대, 소확행

현실에 절망하고 미래가 없다고 여기는 세대들은 거대한 얘기보다는 개인의 사소한 재미를 추구하고, ‘나로서 존재하고 나로서 살아가는 삶’을 예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 트렌드가 요즘 출판되는 책들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는 게 한기호 소장의 분석이다.

<자존감 수업>, <신경 끄기의 기술>,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이 책들은 제목에서부터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언어의 온도> 역시 이런 트렌드와 연관지을 수 있지만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책들이 소확행을 주장한다면 이 책은 소확행을 경험하게 한다.

많은 책들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나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경을 꺼라, 노력하지 마라, 나로 살자. 이는 마음만 바꾸면 당장 될 것 같지만, 마음 바꾸기는 결코 쉽지가 않다.

<언어의 온도>는 나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 속에 이미 있는 오래된 것과 공감한다. 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통찰이나 도전적인 주장이 없기 때문에 책을 읽는 시간이 편안하게 흘러간다. 라디오 음악 프로에서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편안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적으로 긴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지식보다는 휴식을 주는 책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런 공감과 휴식이 좋아서 지인들에게 이 책을 권했을 것 같다. 반면에 지식과 통찰의 확장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이 책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기자는 궁금증을 갖고 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본 후에야 이 책이 내면에 품고 있는 편안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까칠한 태도의 게스트들이 TV 프로에서 인기를 끌고, '나는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고 다짐하는 요즘 시대에 이런 잔잔하고 따뜻한 성찰은 하나 둘 사라져가는 뒷골목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를 소개하면서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쓴다'고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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