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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말기 암' 자원봉사자가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희망

[취재파일] '말기 암' 자원봉사자가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희망
72세 남성이 있습니다. 지난해 7월 폐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오른쪽 폐에 물이 많이 차서 호흡 곤란을 느꼈고, 숨이 차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여생이 8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던 이 ‘말기 암’ 환자는 16년 전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위 절제술을 받은 이력도 있습니다.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 이 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침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힘겹게 병마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할 겁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72세 이건주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기암 투병 평창 자원봉사자
이건주씨를 치료 중인 국립암센터에서 한 번, 코엑스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자원봉사자 발대식에서 또 한 번 만났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로 보일 만큼 건강한 모습에 놀랐고, 발대식에서 만났을 땐 젊은이들과 어울려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자원봉사자 유니폼 패션쇼에 모델로 선 이건주씨는 당당하게 무대를 누비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암 중에서도 예후가 좋지 않다는 폐암, 그것도 4기에 접어든 환자가 일상생활을 그대로 이어가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건주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암이라는 질환,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말기암 투병 평창 자원봉사자
Q. 폐암 진단받고, 많이 상심하셨겠어요.

두 번째 암이었기 때문에 이젠 올 게 왔구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아 1년은 버티겠다 싶었죠. 진단받고 두 달 뒤인 9월에 평창동계올림픽 자원 봉사를 신청하면서 1년 반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그때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어요. 상태가 워낙 나빴기 때문에.

Q. 지금은 굉장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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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다행히 1년 4개월을 견뎠고, 지금은 거의 일상생활을 할 때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병은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치료는 의사선생님한테 맡기고, 나는 정신적으로 병을 이기겠다, 병에 끌려 다니진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나이가 있고 또 완치가 되기 어려운 병이기 때문에, 이르거나 좀 늦거나 하는 차이지 사실 가야 되는 길은 마찬가지거든요. 그 과정에서 내가 병에 끌려 다니진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하면서 병한테 지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Q. 귀한 시간을 쪼개 자원 봉사를 하시려는 이유는 뭘까요?

마지막 자원 봉사를 한다, 그런 생각을 한 거죠. 2001년 3월에 위암 수술을 받고 4월 초에 퇴원했고, 직장생활 다 내려놓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그 무렵 우연히 동사무소에 갔다가 자원 봉사자 모집 광고를 봤어요.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죽기 전에 봉사를 하겠다 결심했죠. 그때 영어 시험보고, 제2외국어 시험도 보고 인터뷰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봉사를 하게 됐어요. 2001년 11월 중순부터 봉사를 시작했는데, 퇴원한 지 6개월 갓 지난 시기라 상당히 힘들었어요. 인천공항 이 끝에서 저 끝까지 3.4km를 왕복하면서 몇 번 주저 앉고 그랬는데, 그런 게 오히려 병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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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손녀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큰 손녀가 외할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폐암이란 얘기를 듣고서 요즘 저한테 살갑게 잘해줘요. 할아버지 왜 아프냐면서 안타까워하더라고요. 제가 그게 하느님의 섭리다, 사람이 죽지 않고 전부 다 살아있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니,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나이 들어서 너희들 같은 손자손녀도 보고 더 나이 들면 병들고 세상을 떠나는 게 순리라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손녀가 그럼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그러더라고요.

죽는다는 것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정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동안에 열심히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다만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가족을 위해서 보람된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가 있다는 것,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죠. 그냥 생명을 연장하는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이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써놨어요.

Q. 마지막 자원 봉사, 마음가짐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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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처럼 너무 나이 든 사람이 앞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젊은 사람들 서포트하는 게 제 역할 같아요. 요즘 자원 봉사하러 온 일부 젊은 사람들 중에는 자원 봉사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없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아요. 경기장에서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 중에 몇몇 분들은 경기 구경하러 간다고 하는데, 경기장 안에 있는 자원 봉사자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반드시 관중석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고 관중을 위해서 서비스도 할 수 있는 거고요.

실제로 제 경우에는 2002년 월드컵 때 공항 안 VIP 라운지에서 VIP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같이 사진 한 장 찍자는 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고요. 손님인데 자꾸 부담 주는 것 같아서 VIP들과는 가급적 사진을 잘 안 찍었어요. 자원 봉사자들 모두 교육을 받긴 하지만, 그렇게 배려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을 제가 직접 보여주고 싶습니다. 좋은 얘기, 좋은 영향을 주는 게 내 역할 같아요. 제가 밀알이 되겠다는 생각이지 제가 꽃을 피우겠다는 생각은 이제 안 합니다.

이건주씨를 치료 중인 한지연 국립암센터 종양내과 전문의는 4기 암이라고 해도 환자가 일상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다면, 굳이 ‘말기암’이라 공포감에 갇혀 지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암을 치료한다는 것이 단순히 종양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아니라, 종양을 줄임으로써 삶의 질을 잘 유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3세대 항암제인 면역치료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면서, 생명 연장보다는 일상생활을 잘 영위해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거죠. 암의 종류와 양상, 환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암에 대한 두려움을 접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때론 더 멋진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건주씨가 모든 암 환자분들께 전하고 싶어한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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