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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05 : 출산과 섹스가 분리된 '소멸 세계'…무엇이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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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나 여자, 그러한 구분 없이 우리는 모두 인류를 위한 자궁이 된 것이다. '정상'이라는 들리지 않는 음악이 우리 머리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음악에 지배당하고 있다. 내 몸속에도 어느새 그 음악이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그 음악을 따라서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아가'를 불렀다."

'아이를 낳는 게 애국'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을 것 같아요. 합계출산율 1.3명 미만인 초저출산 상태가 17년째 지속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러면서도 출산율 낮은 데 대한 책임을 비혼과 이른바 딩크족에서 찾는 한국에서 할 법한 얘기입니다.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고 국가의 소유 내지는 사회의 자산처럼 취급받는 사례가 여럿 있겠습니다만,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쉬운, 흔한 것이 바로 결혼과 출산입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상황이 크게 달랐습니다. 결혼은 당연, 아이는 필수, 둘 이상도 흔했고 셋은 선택, 그런 때에 태어났던 제가 성인이 돼 결혼을 한 뒤에 또 달라졌습니다. 20년, 30년, 40년 뒤에는 과연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때도 결혼 안 하는 게, 아이 안 낳는 게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세상일까요?

단 두 권 읽었을 뿐이지만,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화두에 천착하는 듯한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습니다. 작년 말에 읽었던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가 쓴 <소멸 세계>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지금과 큰 차이는 없는 시대의 일본입니다. 다만 인간의 '번식'이 지금과 다른 일종의 평행세계라는 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주인공인 아마네는 자신이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수정돼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어떻게 달라진 건지, 아마네가 도서관에서 찾아본 대목을 먼저 짧게 읽습니다.

"인간은 과학적인 교미를 통해 번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공수정을 이용한 수정 확률은 교미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졌으며, 안전하다. 선진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졌고, 현재 교미로 번식하는 인종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인공자궁 연구가 활성화되어 남성이나 본인의 자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고령의 여성이라도 임신, 출산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은 유일하게 번식 이외의 목적으로도 섹스를 하는 동물이라고도 하죠. 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도의 저출산에 시달리게 되자 아예 번식과 섹스, 여기서는 교미라고 표현하는 데 분리해버린 사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혼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저씨들 중에 자기 부인과의 애정 행위를 두고 "가족과는 그러는 거 아니야"라고 괴상한 농담을 하는 분들 있죠. 그런 일이 이 소설에서는 실제로 일어납니다. 아마네가 집에서 독립해 결혼하고 또 이혼하는 대목을 들어보시죠.

"나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설마 '가족'에게 욕정을 느낄 줄이야.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남편의 입이 내 입을 막았고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느끼자 욕지기가 치솟았다. 남편의 입에 토사물을 쏟아낸 나는 놀란 그를 밀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30대 한정, 아이 원함, 맞벌이 원함, 집안일 완전 분담 원함, 도쿄 맨션 구매 원함, 연봉 400만 엔 이상 원함, 집에 애인을 데려와서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금지.' 이러한 조건의 '인기 1위, 30대 한정, 스탠더드 소개팅'이라는 이름의 단체 미팅에 신청서를 넣었다. 가장 무난하고 인기 있는 단체 미팅이라 초보자도 부담 없이 참석할 수 있었고 참가자도 많았다."


두 번째 남편과 아마네는 그럭저럭 잘 살아갑니다. 가족으로 함께 살지만 애정 표현은 가족끼리는 금물, 따로따로 연애를 합니다. 이들에게 가족은 일종의 종교와 같습니다.

"연애라는 종교 아래 고통받는 우리는 이제 가족이라는 종교에서 구원을 얻으려 했다. 몸과 마음 모두 세뇌당해야만 간신히 '연애'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후식으로 푸딩을 먹고 소파에 누워 함께 잠을 청했다. 남편의 체온은 강아지나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생활 속에서 키우고 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연애에 지친 이들은 섹스와 분리된 가족을 넘어, 이제는 가족과 출산도 분리하는 실험 도시로 이주합니다. '에덴'이라 명명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 실험 도시는 인공수정을 통해 모두의 아이를 낳고 모두가 엄마가 되는 공동육아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자와 난자로 우리 아가를 낳고 싶었지만 아마네는 인공수정에 실패하고 남편은 오히려 인공자궁을 단 채로 성공합니다. 우리 아가를 보고 싶어 했던 아마네가 신생아실에 들어가 보는 대목을 읽습니다.

"저 멀리서 숨을 더군 아이 몇 마리가 실려 나가자, 이내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이 생명의 양배추밭은, 내가 이제껏 보아온 세상의 풍경 그 자체였다. 성장한 생명은 이내 이곳에서 소멸하고, 발생한 생명이 찾아온다. 생명의 알갱이가 옮겨지면 그 자리에 새로 생긴 구멍에 새 생명이 깃든다…. 우리는 세상에 진열된 생명이다. 그뿐이다. 세상은 늘 그랬다. 생명은 언제나 옳았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 이상일까요. 번식과 쾌락이 분리된 삶, 가족과 연애가 구별되는 결혼….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내일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그러할까요. 언뜻언뜻 스쳤던 생각들이 이렇게 소설 속에 재구성돼 모아져 탄생한 걸 보는 마음이 묘합니다. 디스토피아인가요, 유토피아인가요, 그냥 세계일까요. 제목인 '소멸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의 소멸을 뜻할까요.

이 <소멸 세계>는 <편의점 인간>보다 먼저 나온 작품이지만, <편의점 인간>이 아쿠타가와 상을 받는 등 각광받자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편의점 인간>보다 더 급진적이고 특이합니다.

**출판사 살림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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