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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교 야구 폭력 사건, 그리고 '침묵의 카르텔'

[취재파일] 고교 야구 폭력 사건, 그리고 '침묵의 카르텔'
지난달 23일, 서울 A고 야구부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보도해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도 여전한 학원 스포츠의 폭력과, 학교 측의 은폐 정황에 분노하셨습니다. 질문을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왜 피해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학폭위에서는 폭력 피해자가 원하면 반드시 처벌을 내리게 되어 있는데?’

당시 기사에 쓴 것처럼, A고교는 ‘용서와 화해로 사건이 종료됐다고 판단해’ 학폭위에서 ‘조치 없음’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요 근거는 1-2학년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탄원서입니다. ‘폭력이 심각하지 않았고, 이미 화해와 용서가 이뤄져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므로, 3학년 선수들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탄원서는 정말 ‘자발적’이었을까요?

지난달 12일 오후 12시 3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중식당에 A고 야구부원들의 부모님들이 모였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방 몇 개의 벽을 트고 큰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날은 A고 야구부가 봉황대기 대회 1회전을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모든 부모님들이 경기장으로 가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응원을 준비할 시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긴급하게 소집된 식사 자리였습니다.

분위기는 무거웠습니다. 프로야구계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조용히 묻히는 것 같던 야구부 폭력 사건이, 저희를 포함해 몇몇 매체들의 취재를 통해 다시 수면 위로 불거질 조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건 발생 뒤 석 달 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던 학교 측이 뭐라도 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에 무슨 일이 있을 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 고학년 학부모들은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밖에 이런 소문을 내서 야구부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게 누구냐. 제보자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 아이들이 폭력에 시달려왔다는 걸 알고 가슴에 피멍이 들었던 저학년 부모들은, 오히려 죄인이 되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고교야구 팀들은 학부모들의 돈으로 운영됩니다. 지도자들의 급여부터 아이들의 간식비까지, 모두 학부모들이 부담합니다. 당연히 팀 운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들도 학부모입니다. 그런데 ‘야구부 학부모 사회’에는 군대처럼 엄격한 질서가 존재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이의 학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집니다.

야구부 운영에 가장 오래 참여했고 프로 입단-대학 진학 문제가 눈앞에 닥친 3학년 부모들이 당연히 ‘절대 권력’을 갖습니다. 저학년일수록 발언권이 줄어듭니다. 1학년 부모가 이의를 제기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야구를 그만둬도 된다는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아이가 1학년이면 부모도 1학년’입니다. 이미 오랫동안 학업을 접고 운동에만 전념해 온 대부분의 고교야구 선수들에게, 야구를 그만둔다는 건 인생이 벼랑 끝으로 몰린다는 뜻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학부모회 임원 중 한 명이 미리 프린트해 온 문서를 1-2학년 부모님들에게 돌렸습니다. 제목은 ‘탄원서’였습니다. ‘폭력이 심각하지 않았다. 이미 화해와 용서가 이뤄져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선배 선수들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

당연히 반발하는 학부모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말없이 서명하고 식당을 떠났습니다. A고 학폭위가 폭력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는데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 피해자들의 ‘자발적 탄원서’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취재 과정 내내 폭력 피해자들과 그들의 부모님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마자 대부분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기사 내용 중 상당 부분은 피해자 측이 아닌 다른 분들을 통해 확인해야 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 고발자’라는 소문이 났다가는 야구부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도 선배들의 앞길을 막은 배신자라는 주홍글씨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구 특급 유망주 후배 폭행
반대로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크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운동하면서 이 정도 맞는 걸 못 참아요?” “우리 학교만 유별난 게 아닌데, 왜 자꾸 시끄럽게 만드는 거죠?” 그 분들은 저희 취재진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공유하며 말을 맞출 것을 논의했고, 지금도 제보자 색출과 ‘마녀사냥’에 열심이십니다.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된 시스템을, 다름 아닌 부모들이 수호하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이 취재파일을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당연히 지도자들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3학년 선수들의 폭력을 참다못해 저학년 부모님들이 코치들을 찾아가 호소한 게 5월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감독도 그 시점에는 폭력의 실상을 알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혹시나 그때까지 제대로 몰랐더라도 알려고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치는 가해자들을 ‘말로 훈계’한 게 전부였습니다. 학교에 폭력이 없었다고 보고했고, 이후 경기에 가해자들을 정상적으로 출전시켰습니다. 감독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은 딱 한 번 됐습니다. “내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다음날 하루 종일 학교 앞에서 기다렸지만, 연락은 없었습니다. 그날, 학교 안에서 감독을 봤다는 사람을 나중에 만났습니다.

서울시 교육청의 지시로, 이 학교는 오는 7일 다시 학폭위를 엽니다. 관할 경찰서도 내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진실이 드러날지는 불확실합니다. 확실한 건, ‘침묵과 은폐의 카르텔’ 속에서는 모두가 피해자라는 겁니다. 치유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폭력의 아픔을 가슴에 묻기를 강요당하는 피해자들부터, 언제 들킬지 몰라 평생 가슴을 졸여야 할 가해자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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