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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개국 공신 배넌, 주한미군 철수 발언으로 쫓겨났다?"

배넌 해임 막전막후…한반도 기상도는?

손석민 기자 hermes@sbs.co.kr

작성 2017.08.21 16:21 수정 2017.08.21 17:08 조회 재생수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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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월드리포트] "개국 공신 배넌, 주한미군 철수 발언으로 쫓겨났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지난 1월28일이 미국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 모습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있고, (서있는 사람부터 시계 방향으로)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 스티브 배넌 수석 전략가, 숀 스파이서 대변인,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 보좌관, 그리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통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7개월이 지난 지금, 이 가운데 선출직인 트럼프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 말고는 다 짐을 쌌습니다. 모두 불명예 퇴진이었습니다. 시간 순으로 플린 국가안보 보좌관이 지난 2월13일 러시아와 대선 때 내통했다는 의혹으로 사임했습니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7월21일, 프리버스 비서실장은 일주일 뒤인 28일 경질됐습니다. 그리고 배넌 수석 전략가도 지난주, 18일 해고됐습니다. 이들을 포함해 백악관에서만 지금까지 모두 13명이 옷을 벗었습니다. 이 가운데 단연 압권은 트럼프 최측근으로 '아바타(avatar)'로까지 불리던 배넌의 해임입니다. 어느 때보다 고차 방정식이 된 한반도 상황에서 '근의 공식'과 같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극우주의자 배넌…'아메리카 퍼스트' 설계자

배넌(Stephen K. Bannon)은 1953년,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올해 64살입니다. 주에서 손꼽히는 버지니아공대를 거쳐 조지타운대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왔습니다.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골드만삭스에서 은행가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이력에 더해 배넌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극우 성향 온라인 매체인 '브레이트바트(Breitbart News)'를 운영하면서부터입니다. 브레이트바트는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해 유대인과 페미니즘을 공격하고, 워싱턴과 월가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눈여겨 본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그를 대선 캠프에 영입했습니다. 배넌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미국 우선주의)'라는 히트 상품을 내놓으면서 대선 승리의 1등 공신이 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에게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고문이라는 자리를 안겼습니다. 올해 들어 세계를 들썩이게 한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정책들(반이민 행정명령,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각종 무역협정 폐기,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등등) 역시 배넌의 작품이라는 평이 자자했습니다. 이 정책들은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국제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고립주의에 기반한 것들입니다. 정책의 지향점은 '미국인에게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이라는 쉬운 문장으로 표현됐습니다. 

배넌은 주변에 이렇게 말해왔다고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소외돼왔던 백인 노동자 계층을 누구보다 끌어안은 정치인이었다." 자신이 설계한 대로 트럼프가 잘 따라줬다는 말인데, 자화자찬이 잦아지면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배넌● 개입주의자와 마찰…이방카 부부와도 불화

배넌은 백악관 안팎에서 적(敵)이 많았습니다. 기질상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가치관, 세계관이 다른 주요 인사들과 수시로 부딪혔습니다. 배넌의 적에는 워싱턴 정치권 인사는 물론 월가의 경제인들,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이들의 이익에 충실히 따라왔다고 간주된) 기존 관료들까지 망라됐습니다. 공화당 거물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에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前 골드만삭스 회장),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인 이방카와 그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까지 싸움의 대상에 포함됐다고 합니다.

대외 정책면에서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장성 출신인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 보좌관과 상극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국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개입주의를 중시한 인물들로 고립주의자인 배넌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틸러슨, 매티스, 맥매스터는 미국 내 상위 0.1%에 불과한 엘리트 기득권 세력을 대변한다는 게 배넌의 생각이었습니다. 배넌은 자신이 포함된 백악관 내 불화를 언론에다 자주 알린 인물로 지목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서서히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 북핵 해법 놓고 트럼프에 공공연히 불만

극한으로 치닫던 북미간 대치가 한 고비를 넘던 지난 16일, 배넌의 북한 관련 인터뷰로 결국 사단이 났습니다. 배넌은 진보 성향 온라인 매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American Prospec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는 대가로 미국은 주한 미군을 철수하는 내용의 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본인 스스로 실현 가능성은 요원하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이 주한 미군 철수를 협상 조건으로 언급했다는 것만으로도 일파만파를 낳았습니다. 사실 배넌이 이 인터뷰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부분은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군사적 해법은 없다" "중국과 경제전쟁이 가장 중요하다" 등등 '미국은 북미 대치에서 발을 빼고 중국 문제에 집중하자'였습니다. 협상을 중시하는 비둘기파여서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라는 그의 평소 생각을 드러낸 발언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이런 발언이 나온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배넌의 불만을 들었습니다. 배넌은 트럼프 대통령이 장성 출신들에 둘러쌓여 점점 대외 정책에서 개입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봤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배넌이 주변 인사들에게 '화염과 분노' 등 트럼프 대통령의 도발적이고 즉흥적인 북한 위협에 대한 불만을 심하게 털어놓았고, 미국이 내전 중인 베네수엘라에 개입하게 되는 것도 우려했다"고 전했습니다. 나아가 배넌은 '스스로 초래한 일련의 홍보 참사를 헤쳐나가는 정치적 기술과 단련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부족하다'고 불평해왔다고 합니다.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백악관에는 햇볕이…한반도 기상도는?

배넌의 해임으로 백악관에서 북핵 문제에 관여하는 인사들의 면면과 해법은 보다 선명해졌습니다. 배넌과 대척점에 있던 틸러슨 국무, 매티스 국방, 맥매스터 보좌관이 언급해온 대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수단은 철저히 준비하되, 최대한의 경제적·외교적 압박과 개입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틸러슨 국무, 매티스 국방장관은 최근 미일 안보협의회에서 "이런 전략을 트럼프 대통령이 승인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개입주의에 기반한 대북 드라이브가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합니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다니엘 플레카 외교·국방 담당 부회장은 "배넌의 퇴출로 백악관 내 고립주의자와 개입주의자 간 힘의 균형추는 개입주의자 쪽으로 쏠리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9월 위기설까지 거론되던 한반도 상황은 보다 안정적으로 흘러갈까요? '최대한의 압박과 개입 전략'의 핵심은 북한의 숨통인 원유 공급선을 쥐고 있는 중국에 달려있다는 게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설득에 실패하고 북한이 다시 도발한다면, 그 때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처럼 레토릭(rhetoric)에 그치지는 않을 거라는 관측이 많습니다. 전언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지난 1일 대북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 한다면 전쟁이 불가피하다. 전쟁이 나서 수천명이 죽더라도 거기(한반도)에서 죽는 일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면전에서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배넌의 해임으로 "미국의 해외 군사작전을 가로 막았던 내부 브레이크가 사라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배넌이 내쳐지면서 백악관 참모동인 '웨스트 윙'에는 햇볕이 들겠지만, 한반도 상공의 구름은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습니다. <끝>  

(사진=게티 이미지/이매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