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제보하기

[취재파일] '할 수 있다' 박상영과 '메이저 퀸' 김인경, 그들의 지독한 슬럼프

이정찬 기자 jaycee@sbs.co.kr

작성 2017.08.11 10:59 수정 2017.08.11 11:01 조회 재생수2,023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할 수 있다 박상영과 메이저 퀸 김인경, 그들의 지독한 슬럼프
▶ [비디오머그] 박상영 "할 수 있다" 금빛 주문, 그 비하인드 스토리

● 2016년 8월 9일

벌써 1년입니다. 리우 올림픽 남자 에페 결승전, 14대 10. 동시에 서로 찌르는 동작 한 번만 나와도 금메달을 놓치는 벼랑 끝 위기에서 박상영은 주문을 외웠습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기적과 같은 역전승은 그렇게 완성됐습니다. 울림이 무척 컸습니다. 박상영은 이후 프로야구 시구자, CF 모델, 강연자로 나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습니다. 긍정의 아이콘으로 '할 수 있다'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펜싱 선수 박상영● 그 후 1년

박상영은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고 성적은 곤두박질쳤습니다. 2016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월드컵에서 정상에 섰지만 12월 도하 그랑프리 8강전에서 탈락했고, 올해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2월 밴쿠버 월드컵, 3월 부다페스트 그랑프리, 5월 보고타 그랑프리에서 모두 64강전에서 져 32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잃어갔고, 결정적인 순간엔 망설이다 점수를 잃었습니다. 절치부심해 7월 세계선수권을 준비했는데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64강전에서 세계 127위 선수를 만나 첫판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슬럼프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일수록 더 깊은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급기야 지난 3일, 박상영은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지난 일주일은 박상영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한 주였습니다.
펜싱 선수 박상영● 2017년 8월 9일

박상영은 1년 전 자신의 영상을 다시 봤습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다시 보는 얼굴빛이 어두워졌습니다.
펜싱 선수 박상영Q. 2016년 8월 9일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죠?

"네, 그 전엔 운동만 하면 됐는데, 그날 이후 운동 말고 다른 경험을 처음 하게 됐죠."

Q. 프로야구 시구, CF 촬영, 방송 출연, 강연 같은 거 말이죠?

"네, 운동 말고 다른 일을 하는 자체가 제겐 모두 무척 특별했어요. 프로야구 시구를 하면서 '역시 다른 운동은 더 힘들구나'하고 생각을 했고, CF는 정말 힘들었어요. 좋은 모습만 연출해 보여주는 게 어렵다라고요. 강연할 때는 처음 펜싱 대회에 나갔을 때처럼 다리도 후들거리고 흥분되더라고요."

Q.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죠? 불편한가요?

"불편하지는 않아요. 감사하죠. 하지만 알아봐 주시는 분이 많으니까 행동을 더 조심히 하게 되고, 계속 신경을 쓰다 보니 금방 피곤해질 때가 있어요."

Q.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겪어야 할 성장통이겠죠?

"네. 8월 9일 전의 제 삶은 펜싱이 전부였어요. 펜싱을 정말 좋아하고, 펜싱 경기장에선 누구보다 더 빨랐고, 더 열정이 있었죠. 그런데 8월 9일 이후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성적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왕관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경기 자체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Q. '훈련을 게을리 했다'거나 '자만했다' 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등 혹평도 듣는다죠?

"가장 속상한 일이에요. 올림픽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훈련을 했는데…그런 얘기를 들으면 너무 속상하고 때론 화도 나고 그랬어요."

Q. 그래도 지난달 세계선수권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말 훈련을 철저하게 했는데…지난해 8월은 생애 가장 행복한 달이었는데, 지난달은 무릎 십자인대 부상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던 순간이었어요." 
(박상영은 한창 올림픽 꿈을 키워가던 2015년 3월, 리우 대회를 불과 1년여 앞두고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Q. 슬럼프가 급기야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이어졌네요. 몇 등 했죠?

"9등이요. 국내 8등까지 국가대표가 되는데…9등을 한 거죠. 세계선수권에서 큰 상처를 받고 (울컥) 그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Q. 지난 3일 선발전 후 일주일, 어떻게 보냈어요?

"2015년 십자인대 끊어지고 나서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어요. 그때 너무 많이 울어서. 그 정도로 슬픈 일은 다신 없을 줄 알았는데…선발전 끝나고 너무 하~ (한숨)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세상을 다 잃은 느낌이었어요. 눈물도 주룩 흐르고. 시련을 겪고 나면 더 단단해진다고 하잖아요. 도대체 얼마나 더 단단해지려고 이런 큰 시련을 주시는 건가 생각도 들더라고요."

Q. 때론 노래를 듣거나, 책 혹은 영화를 보며 힘을 얻기도 하는데, 어때요?

"최근에 영화 블리드 포 디스를 봤어요. 세계 챔피언인 복서가 교통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하고도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되는 영화였는데, 실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생각도 하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블리드 포 디스’는 불굴의 복서 비니 파시엔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벌리드 포디스 포스터Q. 이제 목표는 다시 태극마크를 되찾는 것인가요?

"아뇨. 제 자신을 되찾는 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 지금 상황에선 운이 좋아서 국가대표가 되더라도 그저 그런 선수가 될 것 같아요. 역대 올림픽 스타, 운동을 정말 잘했던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너졌던 경우가 참 많잖아요. 먼저 제 자신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데, 솔직히…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무릎 인대가 끊어졌을 때, 결승전 14대 10으로 지고 있을 때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지 말이죠. 지금은 솔직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펜싱 선수 박상영2016년 8월 9일 리우에서 만난 박상영 선수는 누구보다 밝고 건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체육 기자 생활을 하며 받은 기운 가운데 가장 긍정적이고 강력한 에너지였다고 감히 자신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2017년 8월 서울에서 만난 박상영 선수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자신에게 실망한 듯 슬픈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이제 스물 둘. 박상영 선수는 나이에 비해 굴곡이 많은 선수입니다. 2012년 한국인 사상 처음으로 세계 주니어 선수권 에페 결승전에서 우승을 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러더니 바로 이듬해 부상을 입어 고생했습니다. 회복하더니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최연소 펜싱 국가대표가 됐죠. 승승장구하며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랐고, 2014년에는 인천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3월, 앞서 말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펜싱을 계속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던 상황을 딛고 2016년 스물한 살 나이에 마흔두 살의 노장 제자 임레를 올림픽 결승전에서 꺾었던 겁니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원점입니다. 박상영은 시련을 겪을 때마다 늘 더 강해져서 돌아왔던 전력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자신을 단단하게 단련할 차례입니다. 문제는 시간일 겁니다.
펜싱 김인경 선수어떤 슬럼프는 4년 넘게 지속되기도 합니다. 박상영 선수가 최악의 슬픔에 빠져있던 지난 7일 5년 만에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한 골프 선수 김인경 선수가 그랬죠.

LPGA 투어 데뷔 2년 차인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해마다 1승씩 거두며 세계 정상급 골퍼로 활약하던 김인경은 2012년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최종라운드 18번 홀에서 우승을 결정짓는 30cm짜리 퍼트를 놓칩니다. 결국 우승을 놓쳤고, 이후 자책과 악몽,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4년 동안 우승컵을 들지 못했습니다. 브리티시 오픈에서 정상에 서며 '메이저 퀸'으로 부활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인경 선수의 말이 박상영 선수가 1년 전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길 빕니다.
 

"스스로에게 '우승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2012년의 실수를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이건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실망과 자책을 많이 했다."

"실수하는 자신에게 연민을 가져야 과거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나 자신에게 친절해지고, 따뜻해지려고 했다."

"나 자신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실수해도 인생이 긍정적이기를 바라야 한다. 그럴 때 현재가 더 특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