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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경찰의 '늑장 대응'이 피해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취재파일] 경찰의 '늑장 대응'이 피해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 범죄의 재구성

요즘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이미 배 타고 중국 가고 있다"며 농담 반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5천만 원에서 1억 원 가량인 굴착기를 빌려줬다가 그 굴착기가 배 타고 베트남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이 있습니다.

▶ 용의자 찾아 신고까지 했는데…'늑장 수사'에 피해자 분통

지난 6월 2일, 건설업체에 대여금 400만 원을 받고 굴착기 2대를 빌려준 A 씨는 뭔가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빌려준 굴착기가 있어야 할 공사현장에 가봤더니 자신의 굴착기는 사라졌고, 공사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건설업체 담당자에게 전화해 물어봐도 둘러대기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담당자가 중국 출장을 간다며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 B 씨가 있습니다. 대여해준 굴착기에 GPS가 달려있는데 위치 표시가 공사현장에서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B 씨는 6월 9일 인천중부경찰서 관할 지구대에 신고했습니다. 6월 12일, GPS 위치를 따라간 B 씨는 인천항의 한 컨테이너 안에서 자신의 굴착기를 찾았습니다. 컨테이너에 실린 굴착기가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B 씨는 화성서부서에 추가로 고소를 했습니다.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피해자 인터뷰
6월 15일, 건설업체를 사칭한 일당과 연락이 되지 않자 피해자 A 씨는 평택경찰서에 찾아가 고소를 접수하려 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오라는 답을 듣습니다. 다음날, A 씨는 한 목격자에게 이들 일당이 사무실 앞에 나타났고, 용달트럭을 불러 짐을 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일당을 놓칠 것 같다고 생각한 A 씨는 평택경찰서에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A 씨는 경찰에게 피의자 중 한 명의 주소지가 광주광역시니 그곳에 가서 접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일당이 눈앞에서 짐을 싸서 유유히 사라지는 걸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A 씨의 답답함이 그날의 녹취에 남아있습니다.

목격자와 피해자 A의 통화 녹취, 6월 16일
목격자 : "(피의자 일당이) 지금 용달(트럭) 불러서 싸고 계신 건데 통화되신 거에요?"
피해자 A : "아뇨 (연락이) 전혀 안 돼요. 경찰에서도 아직 임대 날짜가 남았다고 비협조적이고…제가 지금 평택경찰서에 갔더니 관할지(광주광역시)에 가서 신고하라고 그래서. 참 어이가 없어요. 범인이 온다고 이야기를 해도 이러고 있으니.”


일당이 도주하던 당일, A 씨는 하는 수 없이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사건을 접수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사건 현장이 평택이니, 굴착기를 찾으려면 평택에 접수하는 게 맞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A 씨는 다시 평택으로 올라와 사건을 접수해야 했습니다. A 씨에 따르면 그사이 일당은 사무실을 비웠습니다.

A 씨와 B 씨 말고도 이 일당에게 굴착기를 빌려준 피해자들은 전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C 씨는 6월 13일 대전동부경찰서에 D 씨는 6월 23일에 평택경찰서에 각각 신고했습니다. C 씨의 사건도 대전동부경찰서에서 화성 서부로, 화성서부경찰서에서 최근 평택경찰서로 담당 경찰서가 바뀌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자만 12명, 굴착기는 20대로 피해액이 12억 원에 달합니다.

● 경찰의 '관할 떠넘기기'와 '늑장 수사'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거주지와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를 합니다.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거주지는 전국적으로 흩어져있고, 범행 발생 장소와 피의자 주거지도 흩어져있습니다. 걸쳐있는 경찰서가 많아 특정 경찰서 입장에서는 '떠넘기기' 좋은 사건입니다. 

평택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다시 평택으로 사건을 접수하러 돌아다닌 A 씨는 피의자 41살 임 모 씨가 범행을 저지른 시기인 6월 초에 거주지를 광주광역시로 바꿨다고 말합니다. 일당은 여러 명이었지만 경찰은 계약서에 임차인으로 등록된 임 모 씨의 거주지가 광주라는 이유로 관할을 넘겼습니다.

이후 경찰은 임 모 씨를 일당 중 가장 먼저 체포했지만, 이 피의자는 말이 어눌하고 어수룩해 명의를 빌려준 ‘바지사장’ 역할일 뿐 실제로 행동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고 피해자들은 말합니다.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피해자가 받은 문자 메시지
평택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한 때는 6월 20일, 경찰에 첫 신고가 있었던 날로부터 꽤 지난 뒤입니다. 피해자 A 씨는 처음 경찰에 신고할 때부터 자동차 렌트와 달리 중장비 대여는 공사현장을 떠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라 설명을 했습니다. 실제로 A 씨가 피의자와 작성한 계약서 제1조에는 "건설기계의 사용 장소는 경기 평택시 죽백동 ***번지로 한다."고 써있습니다.

하지만 A 씨에게 경찰은 임대 기간이 남아 있어 범죄가 명백히 성립된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굴착기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옮겼지만, 임대기간 전에 다시 돌려줄 수도 있고 민사소송(손해배상)으로 가게 되면 지금처럼 경찰이 담당해야 하는 형사 사건(사기)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겁니다.  

6월 26일, 이 사건에 대한 첫 보도가 있고 나서야 경찰은 8명의 전담팀을 꾸려 적극적인 수사에 나섰습니다. 현재까지 일당 중 3명을 붙잡아 구속시키고, 한 명을 불구속 입건시켰지만 한 명은 이미 필리핀으로 출국한 상태. 일당의 총책으로 알려진 용의자도 아직 잠적 중입니다.

● 피해자들에게 미친 영향

7월 3일,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를 참지 못한 피해자들은 경찰청에 항의방문을 했습니다. 취재 중 만난 피해자 중에는 굴착기 20대를 가지고 대여 사업을 하다 2대를 사기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피해자는 그나마 피해를 감당할 여력이 있었지만, 감당키 어려운 피해자들도 많습니다. 경찰청 항의방문이 있던 날 오전, 피해자 한 명은 자해를 했습니다. 캐피탈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장비를 사서 대여 사업을 하던 이 피해자는 30t 굴착기 2대를 사기당하자 앞이 캄캄했습니다. 장비가 사라져 생계는 막막한데,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 캐피탈에서는 장비가 분실된 사실을 알고 압류가 들어왔고 크게 좌절한 피해자는 자해했습니다. 

30대 초반의 또 다른 피해자는 30t 굴착기 한 대가 전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5개월 전 굴착기 임대업을 하던 아버지가 급성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함께 굴착기 임대업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임대업을 이어받은 지 4개월째, 이 가족은 아버지가 남긴 굴착기를 일당에 뺏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범죄자 일당의 처벌도 바라지 않습니다. 훼손되었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비만 찾으면 됩니다. 저희에게 도난당한 장비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피켓 시위
평택 굴착기 사기사건 피켓시위

취재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범인을 붙잡는 것보다 굴착기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수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굴착기는 해외에서 혹은 국내에서 팔려나가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입니다. 

경찰의 역할은 범죄가 일어난 뒤 범인을 잡고 철저히 수사해 처벌받도록 하는 일과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사전 예방과 사후 검거 및 처벌이지요. 그런데 사전 예방 활동의 경우 성과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 데다 많은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가 달린 굴착기가 사라졌다는 피해자들의 호소에 경찰이 조금 더 귀를 일찍 기울였다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들이 경찰청 앞에 한 데 모여 절규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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