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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풋볼프리즘] 미지의 공포, '월드컵 탈락'

[이은혜의 풋볼프리즘] 미지의 공포, '월드컵 탈락'
한때 '90년대생들은 모르는 것들'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삐삐'라 불렸던 무선호출기나 지금은 단종되어 버린 아이스크림의 맛,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가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현석 같은 존재.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들은 '월드컵 탈락'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언제나 그 무대에는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좀 멀게 잡으면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까지도 사실 월드컵 탈락이 주는 충격이나 공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의 10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20대와 30대 중반의 세대들에게 월드컵에 출전하는 우리 국가대표팀을 보는 것은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이었던 셈입니다.

이 대목에 '혜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우리 위의 세대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범근이 있으면 월드컵에서 우승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 그리고 더 윗세대의 어른들에게 월드컵은 언제나 남의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우리와는 아주 상관없는 일.

그랬던 것이 어느 시점 이후 무려 30년 넘게 당연한 일이 된 것은 바로 그 부모 세대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월드컵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방에서 두 번이나 월드컵을 개최했고,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축구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데에는 수 많은 레전드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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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노력이 더 큰 가치를 발하는 순간은, 그것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먼 미래를 위한 것일 때입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맨유에서 뛰고 있던 박지성을 인터뷰 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박지성은 월드컵 개막 훨씬 이전부터 남아공 무대를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힌 상태였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은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고, 실제로 은퇴 이후에도 다시 박지성의 대표팀 복귀가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예상가능한 질문이었지만 "남아공 월드컵 이후 대표팀을 은퇴하는 것은 너무 빠른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만약 내가 브라질월드컵에서도 대표팀 명단에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대표팀이 더 이상할 것 같지 않나?" 우문에 가까운 호소에 정직할 정도로 원론적인 현답이 돌아와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더 좋은 대표팀이라면, 4년 뒤에는 박지성의 자리에 뛸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한국 축구는 현실적으로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월드컵 탈락'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무언가와 마주할 때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공포영화에서 관객이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공포의 대상이 등장했을 때가 아니라 등장하기 바로 그 직전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수의 세대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공포, 월드컵 탈락위 위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정말로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어쩌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에 담담히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과거가 되고, 과거는 종종 망각과 이어진다는 것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망각을 반복하는 인간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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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듯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월드컵이 아니라 작은 것들부터 바꿔나가는 노력일지도 모릅니다. 대표팀 감독 선임 방식을 바꾸고, 한 번의 실패를 미래를 위한 발판이 아니라 누군가 개인의 낙인으로 치부하는 문화를 바꾸어 가는, 쉽지 않지만 기본적인 노력들 말입니다. 여전히 자생력을 갖기 위해 허덕이고 있는 K리그를 돌아보는 일도 필요하겠죠.

홍명보 감독을 국가대표팀 사령탑 자리에 앉힌 뒤 실패자의 낙인을 찍고 재기불능의 지도자로 바꾼 것은 선택과 선택이 이어져 나온 결과이지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독 선임을 주먹구구식으로, 집행부의 입맛에 맞게 진행해 온 협회의 선택, 희생양과 책임자가 필요했던 언론의 선택, 비난의 대상이 필요했던 여론의 선택.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 지금부터의 국가대표팀을 맡게 될 새로운 감독에게 주어지는 것은 '기회'이지 '예정된 실패자의 낙인'이 아닙니다.

미지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는 한국 축구계에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월드컵이 아니라 더 나은 월드컵을 위해 용기있는 선택을 할 권리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고, 누군가에게 실패의 책임을 모두 전가한 뒤 또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눈 앞의 안위에만 머물지 않을 의무도 있습니다. 언론이나 팬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자격이 없으면 당장의 월드컵에는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또 다시 나갈 수 있다는 희망까지 절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SBS스포츠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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