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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브리핑] 6월 민주항쟁 30년…참혹했던 그날의 기억

▷ 주영진/앵커: 시청자 여러분. 30년 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19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졌고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한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이한열 군의 죽음은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한열 군의 죽음 하면 이 두 분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겠죠. 우상호 민주당 의원 그리고 당시 이한열 군을 부축한 사진으로 많은 국민들을 슬프게 했던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나오셨습니다. 두 분 어서 오십시오.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안녕하십니까?
 
▷ 주영진/앵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조금 전에 시청자 여러분들께도 질문 드렸는데 우리 우상호 의원님도 30년 전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시죠?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그럼요. 어제 일 같이 생생하죠. 오후 2시에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에 민주광장에서 다음 날 있을 6.10 학생총궐기를 위해서 제가 주도를 했고요. 집회를 1시간 반 정도에서 2시간 정도 하고 한 4시쯤인가요? 아마 4시 좀 넘어서인가 교문 앞으로 이렇게 쭉 행진해서 교문으로 나갔는데 처음부터 경찰이 굉장히 최루탄을 과도하게 이제 계속 쏘고 학생들에게 뭐 여러 가지 돌도 던지고 이렇게 함으로써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군이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가는 그런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이한열 군 사실 그날 병원에 실려 간 분이 이한열 군만이 아니고 한 10여 명 되는데 보통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 응급 치료 받고 대부분은 뭐 한두 시간 쉬다 나오는데 이한열 군처럼 그렇게 병원에 옮겨져서 바로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로 그렇게 쓰러진 사람은 처음이라서 당시 뭐 넋이 나갔었죠, 사실.
 
▷ 주영진/앵커: 이종창 관장님 지금 화면이 나가고 있는데요. 바로 저 뒤에서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고 있는 특히 저 사진이 당시에 저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당시?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이제 그다음 날 있을 6.10 국민대회를 시민들한테 알리려고 정문 밖으로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제 보통 때와 다르게 구호를 몇 번 외쳤는데 바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그리고 또 다른 때와 달랐던 게 보통 최루탄을 쏘고 조금 있다가 전경들이 보통 뛰어 들어왔는데 그날은 최루탄을 쏘고 바로 동시에 정경들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이제 학생들을 보호하는 사수대라고 하는 그런 조에 편성이 되어 있어서 교문 바깥쪽에 맨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경들이 바로 뛰어 들어오니까 이제 전경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화염병을 전경들 앞에 던지고 거의 맨 마지막에 교문 안으로 뛰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제 최루탄을 워낙 많이 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런데 교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뭔가 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다시 돌아가서 보니까 한 학우가 쓰러져 있어서 이제 안고 이제 전경들로부터 일단 보호해야 한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쪽으로 계속 안고 올라갔었습니다.
 
▷ 주영진/앵커: 이한열 열사하고는 기본적으로 일면식도 없으셨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맞습니까?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네, 그 전까지는 이제 알지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 주영진/앵커: 같은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는 점 말고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다.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네.
 
▷ 주영진/앵커: 그러면 일단 이한열 군을 전경들로부터 멀리까지 데리고 간 다음에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그러니까 제가 한열이를 안고 한참을 올라갔고 이제 정문 쪽에는 전경들이 계속 사복조가 저희를 계속 주시하면서 들어올 듯 말듯 그런 상황이었고요. 그리고 이제 혼자 안고 가는데 좀 힘이 들었습니다. 가스를 다 마시고 이제 한참 힘을 써서 힘든 상황이었는데 한참을 올라갔는데 정문 왼쪽 편에서 학생 2명이 이제 저희를 발견하고 이제 도와주러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거를 확인하고 학생들이 거의 와서 한열이를 부축하는 순간에 저도 잠시 이제 정신을 잃고 깨었는데 다시 일어났는데 학생들이 저 멀찍이 한열이를 안고 가는 상황이었고 아까 우상호 의원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늘 다치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을 했고 그래서 그렇게 많이 다쳤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못했고요. 그래서 그 이후에 계속 전경들하고 이제 싸우다가 이제 정리집회에 가서 우상호 의원께서 그때 총학생회장께서 많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그때 이제 많이 다친 걸 알게 됐습니다.
 
▷ 주영진/앵커: 조금 전에 보여주셨던 밑그림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그림을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맨 처음에 지금 우상호 의원님 말씀하신 연세대학교 앞 바로 저 동그라미 안에 있는 분이 이한열 열사인 거죠?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그렇습니다.
 
▷ 주영진/앵커: 푸른색 마스크를 쓰고 최루탄 가스에 대비하기 위해서 푸른색 마스크를 쓰고 저때만 해도 맨 앞에서 경찰들과 뭐 공방전을 벌였는데 저 사진이 올해 네셔널지오그래픽 기자가 찍었다고 해서 올해 공개된 사진이죠? 바로 지금 저 사진이. 이종찬 관장님께서 당시 도서관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 열사를 뒤에서 부축하는. 그리고 이 사진 지금 머리에 피를 흘리고 초점 없는 시선의 이한열 열사 그리고 마스크를 하고 참 저 시선이 어디를 보고 계셨던 건가요? 경찰을 보고 계셨던 건가요?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제가 추측하기에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경찰 사복조가 양쪽 정문 기둥 바깥쪽에서 저희를 주시하면서 들어올 듯 말듯 계속 이제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 경찰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 정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 주영진/앵커: 바로 저 사진이 우리 이종창 관장님은 뭔가 잔뜩 긴장하고 걱정스런 시선으로 경찰을 응시하고 있고 이한열 열사는 이미 초점을 잃은 시선에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고. 순수한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군사 독재정권의 어떤 폭력성에 희생되는, 폭력에 희생되는 한 상징적인 장면처럼 당시에 87년 6월에 뭐 보도도 되고 대학가에 널리 퍼지기도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어떻습니까, 우상호 의원님?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잘 보시면 알겠지만 저 교문 앞에서 호헌철폐 개헌을 주장한 것이죠. 지금도 개헌이 쟁점입니다만. 개헌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22살의 평범한 대학생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저 상황, 저 사진들이 사실 그 시대 상황을 웅변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1월에 박종철 열사처럼 자기 친한 선배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당하다 숨져가는 이런 이 두 개의 장면은 사실은 당시 87년 상황이 얼마나 엄혹한 상황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죠. 어떻게 보면 그 22살의 평범한 학생이 저렇게 숨져갈 수 있었던 상황. 그것에 대해서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거리에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주영진/앵커: 당시 의원님의 마음상태는 어떠셨어요? 이제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뒤로 숨지기까지는 좀 시간이 좀 걸렸고요.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그러니까 6월 9일 전까지는 저도 다른 대학의 총학생회장처럼 굉장히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어떻게 시위대열을 더 많이 조직해서 거리에 더 많이 나가서 어떻게 전두환 대통령에게 타격을 입힐까? 그래서 어떻게 직선제 개헌을 쟁취할까 그런 소위 말하면 좀 전술적 생각들을 많이 한 편이죠. 그런데 6월 9일 이한열 군이 병원에 쓰러져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제 그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제 낮에는 거리에 나가서 싸우고 밤에는 병원을 지키면서 정말 제가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정말 기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울면서. 제발 살아나라, 제발 살려주세요. 뭐 이런 기도를 간절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 주영진/앵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모습은 이한열 열사 장례식, 영결식 모습인가요?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저기는 진흥고등학교 모교에서 추모식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 주영진/앵커: 조금 전에 화면에 나왔던 분이 이한열 열사의 아버님과 어머님 배은심 여사는 열심히 그 이후에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 집회에 계속해서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고 오늘도 저희가 모시려고 했는데 또 일정 때문에 모시지는 못했는데 아버님이시죠? 그런데 아버님은 이종창 관장님도 기억하시는데 한 1년인가요? 2년 뒤에 바로 또 돌아가셨죠?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5년 후에.
 
▷ 주영진/앵커: 5년 후에 돌아가셨습니까?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또.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그것 때문에 아버님이 화병, 화병이 생기셔서요. 왜냐하면 저 아버님이 이한열 군이 장남인데 위로 누나가 셋이 있고요. 그러니까 제일 예뻐하고 공부도 잘했고 모범생이고 그래서 너무너무 자기 닮았다고 좋아하시던 그런 관계였어요. 그래서 이한열 군 생명, 목숨을 잃고 나서 제가 집에 가보면 아버님이 거의 넋을 잃고 사셨어요. 그래서 농협에 근무하셨는데 거의 정상적인 근무도 못하시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 주영진/앵커: 의원님,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고 그로부터 바로 다음 날 6.10민주화운동이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거리에 나갈 때마다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그 이한열 열사,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뭐 살려내라 이런 구호들이 자연스럽게 나온 건가요?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이제 먼저 구호 선창은 저희 학생들이 했는데요. 학생들이 그 얘기를 할 때 국민들이 그 사실을 뉴스를 통해서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잘못된 일이다 꼭 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음료수도 건네주시고 휴지도 건네주시면서 처음에는 응원군의 모습으로 계속 지켜보면서 격려해주시는 차원이었는데 한 일주일 지나니까 그때부터는 거리에 같이 참여해서 자연스럽게 스크럼도 같이 짜고 구호도 같이 외치는 그래서 일주일 만에 학생 시위에서 시민 항쟁으로 발전하는 그런 모습을 보였죠. 아마 그분들한테 이한열 군이 지금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면 많이 우시더라고요. 자기들도 다 그만한 자식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게 굉장히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도 나름대로 한 계기가 됐죠.
 
▷ 주영진/앵커: 87년 6월 항쟁 당시 모습인데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경찰, 전경들 또 사복 경찰들이 조금 전에 연행하면서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모습도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 말이죠.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저게 한국은행 앞입니다.
 
▷ 주영진/앵커: 한국은행 앞입니까?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제가 그 옆에 있었습니다.
 
▷ 주영진/앵커: 우상호 의원님은 87년 6월은 정말 바로 앞에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처럼 다 기억을 하고 계시겠네요, 어떤 장면이었는데. 이종창 관장님 그런데 사실은 저희가 오늘 모시면서도 이한열 열사를 우연히 교문에서 경찰들과 함께 싸우다가 우연히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는데 그 행동으로 사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종창 관장님의 마음이 어땠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사실 6월이 이제 다가오면 좀 5월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죠. 그런데 이래저래 저 나름 이성적으로 좀 정리를 해보려고 해도 사실 아직도 잘 정리는 잘 안 되고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제 6월 항쟁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뿌듯함도 가지고 있지만 또 그 과정에서 바로 제 옆에서 만났던 친구가 운명을 하고 이제 이런 상황들은 저도 그렇고 뭐 의원님도 그렇고 또 어머님을 뵐 때 항상 그런 기억이 좀 힘든 기억으로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어떤 인연 아마 그때 이제 저희 학생들은 사실 뭐 동지라는 표현도 써가면서 같은 이제 식구처럼 같이 어울리면서 얼굴을 알든 모르든 그렇게 같은 뜻을 가지고 이제 같이 행동을 하는 그런 이제 동료 내지는 동지적인 생각으로 다 함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이제 한 학우가 이렇게 먼저 이제 정권의 탄압에 먼저 운명한 이런 상황들이 쉬운 기억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주영진/앵커: 우상호 의원님은 이제 현실 정치권에 투신하셨고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피를 먹고 자란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30년 전 박종철, 이한열 두 젊은이의 희생이 6월 민주항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로부터 직선제 개헌이 성사가 됐고요. 어떻습니까? 그로부터 30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어느 정도 발전을 거두었다고 보세요?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많이 진전이 됐죠. 현실적으로 보면 대통령도 국민 손으로 직접 뽑게 됐고 그전에는 뭐 선거인단에 의해서 대통령을 뽑는 체육관 선거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여러 가지 선거 절차도 많이 바뀌고 민주적인 절차들이 많이 진행이 됐지만 탄핵에서 또 촛불을 보다시피 아시는 것처럼 대통령에 의한 권력 운용이 또 국정농단으로 이어져서 사실 국민들의 저항이 다시 시작됐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국민들이 지키고 키워나가야 할 나무 같은 존재라고 봅니다. 그냥 어느 한순간에 팽개쳐놓으면 또 피폐해질 수 있는 그런 점에서 보면 3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어린 고등학생까지 저 광장에 앉아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 상황은 시사 하는 바가 많죠. 어쨌든 우리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항상 참여하고 소통하고 감시하는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30주년이라고 생각합니다.
 
▷ 주영진/앵커: 이종창 관장님은 87년 6월 민주항쟁의 의미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작년 촛불광장을 보면서 이제 87년 6월의 그때 이제 일종의 이제 논쟁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학생운동이 좀 투쟁 중심 그리고 좀 폭력을 많이 써가면서 그런 투쟁을 했었고 또 일부에서는 이 민주화운동을 학우들과 같이 하고 시민과 같이 하자, 같이 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투쟁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논쟁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이제 총학생회에서는 학생들과 같이 그리고 시민들과 같이 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계속했었습니다. 그래서 토론을 많이 하고 그런 기억들이 많이 있어서 작년 촛불광장을 보면 저희 때는 학생운동이 좀 선두에 서서 선동하는 그런 민주화 투쟁이었다면 작년 촛불광장은 그야말로 동시에 깨어있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이제 광장으로 참여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30년 전에 부분적으로 지향점을 가지고 했던 이제 민주화 운동이 작년 촛불광장은 옳은 방향에서 한번 꽃 피운 그런 그야말로 시민이 주도가 돼서 뭔가 어떤 국민의 의견을 얘기하고 정부에 문제제기하는 그런 과정을 보면서 87년의 경험이 물밑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져 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주영진/앵커: 그러면 우리 이종창 관장님, 당시 1987년 6월에 연세대학교 도서관학과 2학년 학생 그리고 경영학과 2학년, 같은 동급생이었던 이한열 열사. 30년이 흘렀습니다. 그 이한열 열사는 이 세상에 없지만 저 하늘 위에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계실 텐데요. 혹시 친구 한열이를 만난다면 지금은 어떤 얘기를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매년 그런 생각은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답을 찾지 못하고 이제 어느 해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라가 가지 않은 때, 즉 그럴 때는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고요.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서 좀 즐겁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이 좀 보람을 느끼면서 그런 어떤 그때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뜻, 그런 걸 같이 다시 한 번 공유하면서 격려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주영진/앵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우리 이한열, 친구 이한열 군에게 한번 카메라 보면서 한 말씀 좀 해주시죠.
 
▶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 미안하고 고맙고...
 
▷ 주영진/앵커: 조금 전에 30년이 흘러 그래도 올해는 마음 편하게 한열이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말씀을 못 이으시네요. 우상호 의원님도 같은 마음이실 것 같은데.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같은 심정이죠. 뭐 이제 그 만약 그때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피력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느 기업에 근무하면서 평범한 가장으로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도 하고 또 시간이 나면 자기가 졸업한 학교 교정을 걷고 아빠가 그때는 이런 일을 했단다. 이렇게 알려줄 수 있는 그런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제 가슴이 미어지죠. 그러니까 남들은 87년 6월을 화려한 승리의 역사 기록으로 그렇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들 또 저를 포함한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이거는 되게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그리고 되게 부채의식을 갖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한열이가 거기서 쓰러졌냐 뭐 이런 생각들로 살아온 30년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제 한열이한테 얘기하라 그러면 우리 이제 눈물부터 나는 그런 관계들이죠, 사실.
 
▷ 주영진/앵커: 우상호 의원님은 또 이제 정치인이 되셨으니까 더 큰 시대적 책임감, 부채 의식을 가지시고 대한민국을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드는 데 좀 힘을 보태주시기를 바라고요. 이종창 관장님 혹시 아까 못하신 말씀 있으시면 한번. 1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촛불광장의 힘으로 정권교체는 이루어졌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촛불광장에서 보여주셨던 이제 시민들의 관심, 끊임없이 감시 그걸 통해서 결국은 민주주의는 이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촛불광장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의 기억을 항상 가지면서 감시하고 참여하고 그런 시민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 주영진/앵커: 오늘 우상호 의원님, 이종창 관장님과 함께 1987년 6월 9일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의 의미 짚어봤습니다. 두 분 오늘 긴 시간 말씀 잘 들었습니다.
 
▶ 우상호/전 민주당 원내대표: 고맙습니다.
 
▷ 주영진/앵커: 1987년 6월. 그리고 지금은 2017년 6월입니다. 30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성취해낸 것들 분명히 있습니다. 자부심 가질 만합니다. 그러면 시청자 여러분, 여기서 다시 30년 후의 오늘을 생각해 보시는 것 어떻겠습니까? 2047년 6월. 대한민국은,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요? 30년 뒤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은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그날이 오면 이 노래 여러분께 들려드리면서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 출처 :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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