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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꽃가치 다시 도라오면 을마나 조을까요"

[SBS스페셜] 할매 詩트콤 : 시가 뭐고?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시골 마을. 이 마을의 할머니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해야 했다. 공부는 물론 한글조차 배우지 못했고, 그게 평생의 아쉬움이었다. 

그렇게 살아오다 나이 70~80에 용기를 내어 'ㄱ, ㄴ, ㄷ'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한글 공부 3년 차, 아직은 글씨도 삐뚤빼뚤하고 맞춤법도 엉망이다. 그런데 마을 할머니 아무나 붙잡고 시詩를 써달라고 하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신다. 

"시詩? 오야. 지금 읊어주면 되나?"

그들이 사투리 그대로 툭툭 써낸 시에선 80년 묵은 인생 내공이 투박하게 묻어나온다.


시가 뭐고 - 칠곡시인 소화자 할머니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나왔는데 시를 쓰라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 "결혼식 엎고 싶었지, 뭐! 우리 영감님 인물이 좀 못났거든. 하하."

바야흐로 53년 전. 칠곡 보손리에 살던 학술이는 갓 20살이 되던 해에 첫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어릴 때부터 지내온 친구네 여동생, 말순이. 하지만 그때는 남녀가 눈만 마주쳐도 조심스럽던 시절이었다. 학술이와 말순이는 마을 곳곳에서 숨바꼭질하듯 비밀연애를 했다.

"뻐꾸기 소리 내서 몰래 불러냈지. 1번은 어디, 2번은 어디, 이렇게. 비밀장소 정해서."
"거기서 만나면 뭐하셨어요?"
"이거.. 뭐 했다 캐야 하는가. 뽀뽀도 하고 그랬겠지 뭐. 하하."

그 시대엔 이런 연애결혼은 드문 경우였고, 대다수가 중매로 결혼했다. 옆 마을 장순이도 마찬가지. 빼어난 미모로 이름 날리던(?) 장순이는 22살 어느 봄날,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결혼식을 치렀다. 

하지만 장순이는 남편을 보자마자 결혼을 엎고 싶었다. 콧대 높은 장순이에겐 남편의 외모가 영 성에 안 찼기 때문.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 없으면 못 살지 싶어요. 무섭고. 지금도 없으면 무서워서 혼자 잠을 못 잔다카이."

부족한 외모(?)를 이겨내고 할머니를 푹 빠지게 만든 마성의 남자, 신세균 할아버지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그마치 50년의 시간을 함께 거쳐 온 '남편'. 할머니들은 고마우면서 밉고, 애틋하면서 또 지긋지긋한 이 감정을 여러 편의 시로 풀어냈다.


영감 - 칠곡시인 조덕자 할머니

젊은 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주막에 있는 시간이 드 만낫다
호호백발 할배 대니 갈 곳이 없어 집박계 모르네 이재사 할마이가 제일 좋다 하네



● '조금만 절머쓰면 영어도 컴프테도 배우고 싶어요' (소귀덕 할머니의 ‘공부하는 날’ 중에서)

따뜻한 봄날. 마을에 시 쓰는 방이 세워졌다. 흙 때 잔뜩 낀 손으로 꾹꾹 눌러쓴 시詩에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또 젊을 땐 챙기지 못했던 ‘나’도 녹아있다. 

이 시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할매들을 꼭 껴 안아드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매력이 터져 나온다. 

이처럼 눈물 날 일도, 웃음 날 일도 많았던 인생을 투박하고 순수한 시를 통해 읽어봄으로써 깊게 팬 주름에 숨겨져 있던 아이 같은 할매들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작약꽃 - 칠곡시인 이쇠건 할머니

자야자야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올해도 여전히 연분홍 작약이 아름답게 피였네
나는 나는 시집온 지 육십 오년 되었구나 
그래서 내 나이는 팔십육세란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옃다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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