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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FIFA 178위, 바누아투 '어서 와, 월드컵은 처음이지?'

[취재파일] FIFA 178위, 바누아투 '어서 와, 월드컵은 처음이지?'
이번 주말 전주에서 개막하는 20세 이하 월드컵, 여기 참가하는 24개 나라 가운데 큰 관심을 끄는 팀으로 바누아투가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무대에 데뷔하는 작은 섬나라입니다. 오세아니아 예선을 2위로 통과하며 극적으로 한국행 꿈을 이뤘죠. 1980년 독립한 뒤 바누아투가 FIFA 주관 대회 본선에 나선 건 각급 대표팀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떤 팀일지 궁금했습니다. 찾아가 하루를 함께 했습니다.

# 오전 09:30 - 비디오 전술 미팅

바누아투 선수들은 아침부터 카메라 렌즈가 자신을 향하자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팀을 이끄는 사령탑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습니다. 비디오 미팅을 준비하던 데얀 글루세비치 감독은 “미디어를 통해 여러분을 알리는 건 프로 스포츠 선수에겐 전술 훈련만큼 중요한 일”이라면서 “오늘 하루 여기 계신 신사분들이 여러분을 취재할 텐데, 잘 해내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먹서먹하게 첫 인사를 했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겐 너무 추운(?) 한국의 날씨도 한몫했는지도 모르죠. 남태평양의 따뜻한 섬나라에서 온 청년들은 한국 분위기가 어떤 것 같냐는 질문에 “춥다. 너무 춥다”고만 했을 정도니까요.

카메라와 마이크는 꽤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질문을 해도 대부분 '예, 아니오‘ 같은 단답형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저 선수가 영어 잘해요”라면서 인터뷰를 미루는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방송 기자에겐 참 난감한 순간입니다.
바누아투 선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비디오 전술 회의를 하고 있다.
바누아투가 낯선 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면적은 전라남도와 비슷하고, 인구는 27만 명으로 전라북도 군산시 규모입니다. 축구리그는 아마추어리그 뿐이고, 이번에 참가한 선수들은 대부분 학생들이라고 합니다. 글루세비치 감독은 “역대 FIFA 월드컵에 참가한 나라 가운데 가장 작은 나라”라고 소개했습니다. 선수들 대부분 오세아니아를 벗어난 게 처음이라고 하니 서로 어색한 건 당연합니다.

# 오후 1:00 - 중앙 시장 방문

그래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곳에서는 달랐습니다. 더없이 맑고 순수해 보였습니다. 특히 훈련 전 함께 시장에 갔을 때가 그랬습니다. 당초 팀이 짠 일정에 시장에 가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취재진이 팀 스태프와 취재 일정을 협의하며 훈련뿐만 아니라 일상 모습도 취재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피타 타카로 단장은 ‘특별한 계획이 없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없냐’고 되물었습니다. ‘전통 시장에서 우리 먹거리를 접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회 개막이 닷새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선수단 전체가 계획에 없던 이동을 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숙소에서 중앙시장까지 거리가 2km 정도로 가까운 편이지만 팀이 이동을 하려면 버스를 대여해야 하고, 또 휴식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선수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타카로 단장은 “좋은 생각이다. 코칭스태프와 상의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취재진이 “훈련 준비에 방해가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자 “아직은 대회까지 시간 여유가 있고, 회복 훈련이 예정된 날이라 훈련 강도도 높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단장과 감독을 포함한 선수단 전원이 중앙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장에 도착한 선수들은 금세 분위기에 녹아들었습니다. 상인들, 어린이와 셀카를 찍으며 추억을 쌓았습니다. 천안 명물 호두과자를 맛보고는 “달콤하고 부드럽다”면서 좋아했습니다.
천안 중앙시장을 찾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바누아투 선수
자연스레 카메라에 대한 경계는 줄었습니다. 다양한 모자를 써보면서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선수들은 바누아투 사상 첫 월드컵 도전, 그 순간순간을 즐겼습니다. 수비수 조세프 이아루엘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게 참 재미있다”며 활짝 웃었습니다. 또 “월드컵에 오기 전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한국 문화와 음식을 즐기고 있다. 이제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차례다”라고도 했습니다.

앞서 바누아투 선수들의 적응력에 깜짝 놀란 건 식사 시간 때였습니다. 9일 입국해 아직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난생 처음 사용한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김치를 먹을 정도가 됐더군요. 천안축구센터에선 선수들을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준비해뒀지만 대부분 선수들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썼습니다.
사진=비디오머그 캡쳐
# 오후 5:00 - 오후 훈련

불과 반나절만에 선수들과 친밀감이 꽤 생겼습니다. 훈련 전 선수들은 바누아투 전통 의식으로 기를 모으는데, 취재진을 부르더군요. 과거 전투에 나서기 전 힘과 용기를 기원하는 춤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밀리, 밀리’를 외치며 시작합니다. 바누아투와 가까운 뉴질랜드의 ‘하카’와 비슷한데, 이름도 ‘바카’라고 합니다.
즐거운 표정으로 바카를 외치는 선수들.
역동적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몇 차례 다시 해달라고 요청을 하는데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주었습니다. 주장 봉 칼로는 “원 안에서 찍어야 잘 나온다”면서 촬영 기자를 훈련장 한복판으로 데려가 서너 차례나 반복해 바카를 이끌었습니다. 때문에 훈련 시작 시간이 조금 늦어졌지만 감독은 괜찮다고 얼마든지 더 찍어보라고 취재진을 배려했습니다.

흔치 않은 일입니다. 보통 축구팀 훈련을 취재할 때 취재 공간은 터치라인 밖으로 제한됩니다. 일부 지도자들은 일부러 카메라 반대편 터치라인 근처에서 훈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취재 활동이 훈련 집중에 방해가 된다고 믿는 경우죠. 대회 기간엔 감독이 지정하는 선수만 인터뷰할 수 있도록 하는 팀도 있습니다. A대표팀이 나서는 월드컵 기간에는 선수단이 쉬는 호텔은 출입 자체가 엄격히 통제됩니다. 훈련도 비공개로 하거나 초반 15분만 공개하는 일이 보통입니다. 전주에서 개막전을 준비하는 우리 20세 대표팀도 17일에는 훈련 장면을 15분만 공개했습니다.

# 저녁 7:00 저녁 식사 후 휴식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한 선수가 오렌지 주스를 취재진에 건네더군요. 그리고 주장 칼로는 식사 후 취재진을 방에 초대했습니다. “축구는 바누아투 사람들이 즐기는 유일한 스포츠”라면서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나온 우리는 바누아투의 국민 영웅들이다”며 넉넉하게 웃었습니다.

바누아투의 FIFA랭킹은 179위, 국내총생산(GDP)는 그보다 딱 한 계단 높은 178위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가져온 훈련장비라곤 공 뿐이고, 옷도 훈련복과 바람막이가 전부로 단출하게 왔습니다. 그래도 세계에서 4번째로 행복한 나라(해피 플래닛 인덱스) 선수들답게 모두 이번 도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수비수 제이슨 토마스는 “모든 팀이 우리를 만만하게 본다. 하지만 깜짝 놀랄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회 뒤엔 어떤 꿈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축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바누아투엔 프로 축구팀이 없지만 축구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죠.”

바누아투 20살 청년들은 한국에서 행복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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