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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90 : 노동과 삶의 향기를 담은 책…'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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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태 나이가 사람 나이로 팔순을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다 '워낭소리'의 늙은 황소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앞으로 딱 10년만 같이 있어주길 바랍니다. GT451D는 주민번호이고 그의 진짜 이름은 강경태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좋은 날씨가 이어질까 싶지만, 햇살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나가 놀기 참 좋은 날입니다. 이런 날 어디 잔디밭 파라솔 아래 누워 책을 읽다 자다 깨다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책은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웃기지도 너무 심각하지도, 그러면서도 마냥 즐겁지도 않은 적당한 책이어야지요.

하루키 산문집 몇 권이 떠오르는데 한국인 저자의 글과 책 중에도 당연히 그런 책이 여럿 있습니다. 노동절 127주년을 하루 앞두고 휴식을 꿈꾸는 노동자의 마음을 담아 책을 골랐습니다.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입니다.

소설가와 기자, 노동자, 시인, 농민, 우체부, 학자, 노동운동가 등 다양한 직업과 환경에 있는 이들이 쓴 산문 60여 편이 실려 있습니다. 다른 책을 통해 읽은 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글이 훨씬 많았습니다. 먼저 시인의 글부터 읽습니다.

"함께 빨래를 개며 아이는 공룡의 위계질서를, 어린이집에서 오늘 겪은 일을, 여기까지 오는 동안, 통학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2분 거리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쉴 새 없이 말한다. 죽은 개미를 보았고, 가로수의 껍질에 어떤 무늬가 있었고, 민들레가 마당에 피었고, 구름이 어쨌고. 이 놀라운 연구자의 보고를 경청하자니, 우리 집 주변은 놀라운 정보로 가득 찬 세계다."

"사람은 애초에 위대한 발명 능력과 위대한 공감 능력과 위대한 표현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나는 이 아이로 인해 짐작이 아닌 확신으로 받아들인다. 표현의 무능에 대한 고뇌를 아이와의 하루 동안 잠시 잊는다."


김소연 시인의 이 글 '선물이 되는 사람'은, 마음 산책에서 나온 [시옷의 세계]에 실렸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6살 아이를 봐주는데 오히려 아이로부터 많이 배웁니다. 표현의 참신함부터 발명, 관찰, 표현, 그리고 공감 능력까지. 이렇게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 왜 어른만 되면 그렇게 공감 능력부터 죄다 퇴보하는 걸까요.

"우리 GT(앞으로는 경태라고 부르겠습니다)는 밖으로는 45라고 짐짓 자신을 낮추지만 논 수렁에 빠진 다른 기종 40마력짜리를 너끈히 건져 올리고도 약간 코를 씩씩거리는 정도로 수고로움을 표시하곤 마는 것입니다."

"경태는 게으른 놈은 아니지만 추운 날씨에 무턱대고 일을 서두르는 놈도 아닙니다. 주인이 피곤하게 저녁까지 일할까 봐 라이트도 없습니다. 냉각수 온도 계기판과 연료 계기판이 고장 났습니다. 매일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지요.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대에 오직 눈으로 보고 그것만 믿으라고 강조하는 경태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실학파 농기계임이 분명합니다."


요즘처럼 인공지능이 화두인 시대에, 시동도 맘대로 안 걸리는 트랙터에 이름 지어주고 자기 성을 따서, GT니까 경태라고 이름 붙이고…. 밭 가는 황소처럼 트랙터도 아끼는 것 같은 농부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해 조금은 뭉클하고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저도 7년 된 제 차에 '앨프'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세차해준 지 오래돼서 좀 서운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쩐지 몰라도, 예전엔 모두 가난한 연인이었던 사람들이 민원을 넣고 있다.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가? 학생들이 보기에, 우리들은 어쩌면 모두 길거리에 누워 있는 취객들인지 모른다. 그와 다르지 않다."

"모두 어린 시절, 잡히지 않는 도깨비불을 쫓아 허방 같은 어둠을 헤매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이제 스스로 도깨비불이 되어,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도깨비불들 위로, 거대한 아파트의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연약한 도깨비불들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이기호 작가의 이 글들은, 랜덤하우스에 나온 [독고다이]에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데도 이리도 맛깔나게 글을 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10년도 더 전에 소설가 김훈 선생이 다시 사회부 기자가 되면서 '길 위의 칼럼'이라는 정말 짤막한 칼럼을 썼는데 '문재란 이런 것일까' 하는 경탄을 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다닥다닥 낡은 집들이 붙어 있는 좁은 동네 골목을 걷다 보면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며, 고등어조림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간이 딱 맞는 냄새, 진하기가 딱 맞는 냄새, 삶이 저래야 할 듯한. 냄새는 순간 기억하게 한다, 오래전에 살았던 집들을."

"뿌리내리기란 단순히 한 곳에서 오래 산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몸만 있을 뿐 마음이 없다면 뿌리내리지 않고 잠시 발 걸치고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뿌리내리기는 바람이며 동시에 두려움이다."


(출판사 봄날의책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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