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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바다와 역사가 숨 쉬는 길 - 강화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②

길은 광성보로 이어진다.

광성보는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해 간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이기도 하다.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내야 했던 절망과 아픔의 현장이 광성보다. 
용두돈대.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내야 했던 절망과 아픔의 현장이 광성보다.
광성보는 강화도 내 7개의 보(堡) 중 하나로, 신미양요의 가장 처절한 현장이었다. 초지진에서 광성보에 이르는 강화해협은 인천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올라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특히 광성보는 그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유속이 빠른 손돌목을 지키는 중요 요새였기 때문에 환란의 아픔을 그 어떤 전초기지보다 아프게 떠안아야 했던 것이다.
손돌목은 유속이 빠르고 폭이 좁은 전략요충지였다.
여기서 잠시, 진(鎭), 보(堡), 돈대(墩臺)로 나눠지는 강화도 방위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강화도는 고려 때의 몽골항쟁부터 구한말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략요충지였다. 그런 이유로 고려 때는 해안을 따라 10리에 하나씩 진(鎭)을 두었으며, 진과 진 사이에는 보(堡)를 두고, 진과 보 사이에는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이후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5개의 진과 7개의 보를 합친 12진보를 두어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그 아래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다.
용두돈대는 손돌목을 지키는 보루였다.
1871년 6월, 미군의 아시아 함대와 강화도의 조선 군사 사이에 교전이 일어난다. 나중에 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불리는 조-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의 원인은 미국이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침몰당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 규명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아시아 함대의 기함 콜로라도 호
당시 흥선대원군의 조선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침탈되는 과정을 지켜본 터라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였다. 그런 이유로 미국의 요청은 당연히 거부되었다. 이 거부의 배경에는 5년 전(1866년) 프랑스 함대와 미국의 셔먼호를 물리쳐 본 경험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잇따른 교섭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강화해협으로의 진입과 해상로 파악을 위한 탐침을 계속하자,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에게 약탈된 어재연 장군기. 2007년 장기 임대 방식으로 돌려받았다.
전투의 결과는 조선의 처참한 패배였다.

미군 측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의 피해는 조선군 지휘관이었던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성 안에서 전사 100여명, 성 밖에서 전사자 240여명, 백병전에서 피살 또는 투신자살한 사람이 100여명이었다고 한다. 반면, 미군 측의 피해는 사망 3명에 부상자 10여명에 불과했다. 
점령당한 후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
동양의 변방인 조선과 남북전쟁를 겪은 뒤 얼마 되지 않았던 전쟁 문명의 결정판이었던 미국과의 충돌은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문명의 차이만큼이나 뚜렷한 전력차를 드러내고 말았다.  
용두돈대의 대포. 미군 대포에 비해 성능 면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전투 초기 양쪽의 전투형태는 치열한 포격전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포가 단순히 화약에 의해 포탄이라는 쇠뭉치를 날려버리는 수준이었다면, 미군의 대포는 사거리의 차이는 물론이고, 표적지에 도달한 포탄 자체가 폭발하는 현대식 포탄인지라 조선군의 피해는 막대했고, 그야말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던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의 미군의 대포
당시 광성보를 방어하던 조선 군인의 수는 600여명. 그 중 450여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부상자와 포로를 제외하고는 전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가 증언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조선군의 방어가 악착같았고, 치열했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죽음으로써 항전했지만, 광성보의 함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쌍충비각.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인 어재순을 기리고 있다.
광성보와 그 주변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이 일대에 주둔하면서 지속적으로 조선 조정에 통상 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이 교섭에 응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자, 미군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철수하고 만다.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의 조선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보다는 어떻게든 적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홍보하며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2년 뒤 실각함으로써 쇄국정책은 그 명을 다하고 만다.
함락당한 덕진진에 미군기가 게양되고 있다.
1875년,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4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지 2년 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은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의 운양호가 강화도에 나타난 것이다.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이다.

운양호 사건의 주무대는 초지진(草芝鎭)이다. 초지진은 오늘 여정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운양호 사건은 초지진에서 좀 더 이야기하도록 하자.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신미양요 그날의 이름 없는 주인공들을 기리고 있다.
광성보의 주요 요새인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로 길이 나뉘는 지점에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신미양요 그날의 이름 없는 주인공들을 기리고 있다.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의 목줄에 비유되는 손돌목을 지키는 요새이다. 용두돈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손돌목은 바다라기보다는 거센 물결의 강처럼 보인다. 저 검은 물속으로 전쟁에 패한 조선의 수많은 군사들이 몸을 던졌으리라. 그들의 울분과 비탄이 아직도 손돌목을 배회하는 듯 스산하기만 하다.
손돌목 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용두돈대에서 100여m 떨어진 언덕 위에는 손돌목돈대가 있다. 광성보의 마지막 보루로, 상륙한 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손돌목에서의 치열한 백병전은 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그 용감한 조선군에 대한 찬사가 미군 측의 기록에도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미군에게는 조선군의 무모하리만큼 거센 저항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이다.

포격전에서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던 미군은 손돌목돈대에서의 백병전으로 중위 계급의 장교 한 명이 창에 찔려 사망하는 등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길은 꼬불꼬불 작은 산길을 지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길은 광성보 포대를 지나 산길로 이어진다.

사실 산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짧은 산길이다. 10여분을 걸으면 길은 다시 갈대들이 무성한 바다로 이어진다.
용두돈대는 아직도 강화해협을 지키고 있다.
얼마를 걷다 돌아본 길 너머엔 용두돈대가 강화해협의 손돌목을 안타까운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대들의 사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강화나들길 2코스 중 걷기에 가장 좋은 구간은 광성보에서 덕진진에 이르는 구간이다. 바다와 벗 삼아 걸을 수 있으며, 그 길의 여건이나 아기자기한 다양한 풍광들이 걷는 이를 편안하게 해 준다. 다만 시작점 대비 12~13km를 걸은 후로, 2코스의 마지막 1/3을 남겨둔 지점이라 체력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돌길이 주는 길의 거칠고 투박함이 걸음걸이의 조심스러움을 강제한다.
특히나 갈대밭을 가로지르는 돌로 만든 길은 걷는 이의 발밑을 돌아보게 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인지하고, 스스로 깨닫게도 하는 듯하다. 돌길이 주는 길의 거칠고 투박함이 걸음걸이의 조심스러움을 강제하는 탓일 게다. 

그렇게 걸음이 느리니 그 걸음을 느낄 수 있고, 그 느린 걸음은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차라리 천천히 제대로 걸으라는 길을 만든 이의 마음 같기도 하고, 그런 마음은 걷는 이에게 차라리 위안이 되기도 한다.
서두른다고 얼마나 멀리, 또 빨리 갈 것인가. 그냥 또박또박 걸어가면 될 일이다.
사실 조금 더 서두른다고 얼마를 더 멀리 갈 것이며, 또 멀고 높은 곳으로 간들 그게 또 무슨 대수일까. 어쩌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 걸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것이 길이든 인생길이든 걷는 이의 제대로 된 자세인지도 모르지 않은가. 우리 집 어른의 ‘사는 거 별 거 아이다’라는 말씀을 길 위에서 기억해 낸다.
논둑길을 걸으면 과거를 지나는 듯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길은 저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어, 어느 길을 걷든 나름의 풍취에 취할 수 있다. 해안길은 해안길이라 좋고, 논둑길은 또 논둑길이라 좋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은 다음 길이 어떤 모습일지를 짐작하는 즐거움이 있다.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걷는 이의 마음 자세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가려 걷는다고 그 길이 항상 꽃길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덕진진을 함락한 후의 미군들
길은 어느새 덕진진에 이른다. 덕진진에는 덕진돈대가 있고, 남장포대가 있다. 이곳 역시 신미양요의 격전지 중 한 곳이다.

문득 역사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신미양요 이후 60여년이 지난 해방공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우리나라 최고의 안보 동맹이니 말이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치른 일본 역시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살고 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새삼스레 나라를 걱정한다. 역사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른다.
다만 북핵 사태로 인한 최근의 안보 불안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미국의 핵 항모인 칼빈슨함이 한반도로 이동하는 등 미군 아시아 전력의 반 이상이 한반도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에는 공포마저 느껴진다.

외신들이 전하는 소식들은 조만간 미국의 북한 폭격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낭설일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 안보가 우리의 손이 아닌 남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동시에 한반도 안보상황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는 이치는 국익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국익에 부합한다면, 오늘의 우방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주국방을 위한 역량 결집과 의식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초지포구에는 조업을 끝낸 배들이 한가로이 포구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
오늘의 종착지인 초지진이 머지않았는지 초지포구가 멀리 보인다. 조업을 끝낸 배들은 한가로이 포구에서 몸을 쉬고 있고, 포구에 늘어선 횟집들은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이 그리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 사람들은 이곳 초지포구로 모여들어 시끌벅적 자신들이 살아낸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포구
드디어 초지진(草芝鎭)이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진입로인지라,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1866년), 미국의 아세아 함대(1871년), 그리고 일본 군함 운양호(1875년)가 만들어낸 참화를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 방위의 전초기지였다.
초지진 돈대. 초지진은 운양호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미군이 주둔한 곳이 초지진이었고, 운양호 사건 당시에는 초지진이 운양호와 대적한 전장이었다.

당시 흥성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막을 내리자, 일본은 조선의 문호를 열 적기로 판단하고 부산과 동해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후 강화도에 운양호가 나타난 것이다. 운양호는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측량을 구실로 연안을 정탐하면서 긴장을 높여갔다. 전투를 유발한 것이다. 이에 조선은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연무당. 주위를 일본군이 둘러싸고 있다.
역시 결과는 참패였다. 조선 측이 3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지만, 일본 측은 2명의 경상자가 발생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아쉬운 것은 4년 전 미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던 그 용맹성을 상실한 것이었다.

결국 조선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한다. 국권침탈의 시작이자,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바로 그 조약이다.
초지돈대를 점령한 미군들의 모습
결과적으로 무력한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불과 4년 전 신미양요의 그 처절한 항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신미양요의 주인공들에게는 드라마 유행어처럼 ‘내가 이럴려고 그 험난한 역사를 썼나?’고 되묻고 싶어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결국 신미양요는 무의미한 전쟁이 되어 버렸고, 광성보의 450여명에 이르는 고혼들의 희생은 덧없는 죽음이 되고 만 것이다.
초지진의 초지돈대.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불과 4년 전 신미양요의 그 처절한 항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조선은 20여 년 동안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고, 오래지않아 일본과 을사늑약(1905년)을 체결함으로써 주권을 잃은 이름 없는 나라가 되고 만다.

초지진임을 알리는 입간판 아래에도 신미양요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찍은 사진들이다.
초지진 소나무는 초지돈대 성곽에 기대어 서서 그날의 처참했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다.
초지진에는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소나무는 초지돈대 성곽에 기대어 서서 그날의 처참했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다. 130여 년 전 초지진이 외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살육이 자행되던 그 순간의 아픔을 소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소나무를 바라본다. 수령 400년, 이름하야 ‘초지진 소나무’. 초지진의 수호나무로, 긴 세월을 살아낸 소나무는 물끄러미 초지돈대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그래도 잘 살아남았다고, 그 흉한 세월을 겪고도 잘 살아남았다고 위로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날을 잊지는 말라고 당부를 할 것이다.
길은 또 어디론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을 넘으려는 지금, 초지진 소나무의 너른 품이 역사의 상처뿐만 아니라, 먼 길을 걷느라 여독에 지친 행인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지치고 아픈 우리네 모두를 다독이며 품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험한 세월도 이겨냈는데, 지금의 힘듦과 아픔이야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며....

오늘의 여정이 끝이 났다. 문득, 길의 끝에서 다음 길을 계획하게 된다. 다음은 어디를 걸을까?

** 강화도 가는 길

강화도 가는 버스 : 직행 3000번, 좌석 800번, 급행 8601번, 급행 8600번
강화도 내 시내버스(2코스와 연결되는 버스) : 51번, 52번, 56번, 해안순환(1번, 2번)
강화도 내 택시 : 강화콜(1577-6669), 개인콜(1566-1771), 초지진에서 갑곶돈대까지 택시요금 13,000원~15,000원(협상요금).

▶ [라이프] 바다와 역사가 숨 쉬는 길 - 강화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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