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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남북 낭자, 마음껏 수다 떨 날은 언제쯤 올까?

"'그동안 잘 지냈냐?', '평양 밥 맛있더라.' 이런 사소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여자축구대표팀 간판 공격수 지소연이 북한전을 앞두고 평양에서 한 얘기입니다.

남과 북 여자 축구 선수들은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사이입니다. 양 팀 선수들은 2010년 이후 매년 한 차례 꼬박꼬박 국제대회에서 맞대결을 펼치며 제법 친분이 쌓였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언어를 쓰니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지소연 선수는 "처음 국제대회에서 북한과 경기할 때, 상대 작전 지시가 다 들려 신기(?)했다"고 말하기도 했죠. 사실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두 나라 선수들 사이에 언어의 장벽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분명 있습니다. 또래 선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 안부를 나누기는 지구 반대편 나라 선수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스마트폰 메신저 소통은 고사하고, 같은 대회에 출전해도 경기 전에는 쉽게 마주치기 어렵고, 마주쳐도 눈빛만 나눌 뿐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습니다. 보는 눈도 많고, 혹시 모를 불편한(?) 상황에 대비해 각 팀과 조직위가 동선을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대회가 끝난 뒤에는 사정이 잠시 나아집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이었습니다.

준결승에서 우리와 명승부를 펼친 북한(2-1승)이 금메달, 우리가 동메달을 확정한 뒤 시상식에서 만났을 때였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았습니다.
아시안게임 한국 북한 여자 축구팀
금메달을 목에 건 북한 공격수 라은심과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 조소현이 어깨동무를 하고 선수단 전체가 섞여 찍은 사진은 인천 아시안게임 최고의 명장면이었습니다.

라은심과 조소현, 88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은 이듬해 중국 우한에서 동아시안컵을 앞에 두고 다시 만났습니다.

이때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대회 기간 조소현은 "은심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같은 호텔 바로 위아래 층에 머무르면서도 잘 만나지 못했습니다.

둘은 시상식 때서야 만나 얘기를 나눴습니다. 

두 친구의 대화를 그대로 옮깁니다.

라은심 "나 보고 싶었다며?"

조소현 "응 그랬지"

라은심 "근데 왜 말 안 걸었어?"

조소현 "응 그냥 ㅋㅋ 근데 너 평양에서 살아?"

라은심 "응 평양에서 살아"

조소현 "다들 평양에서 살아?"

라은심 "응 다 평양에서 살아. 캐나다 좋아?"

조소현 "응 좋았어"

라은심 "머리는 왜 잘랐어?"

2015 동아시안컵 시상식
라은심은 캐나다, 조소현은 평양이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가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겁니다.

캐나다는 2015 여자 월드컵이 열린 곳입니다. 당시 한국은 12년 만에 출전한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죠. 여자 월드컵 단골손님 북한은 2011년 독일 월드컵 당시 도핑 사실이 적발돼 캐나다에 가지 못했습니다.  

조소현은 캐나다보다 훨씬 가깝지만 '갈 수 없는' 평양이 궁금했겠죠.

이 대화 내용을 전해 듣고 여러 감정이 스쳤던 기억입니다. 귀여운 대화 내용에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내 뒷맛이 씁쓸해졌습니다.

이런 사소한 대화조차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시상식 장소에서야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북한이 우승, 우리가 그보다 못한 결과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그 반대 상황은 연출된 적이 없어서 섣불리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어쨌든 남과 북이 그라운드 위에서 또 만났습니다. 조소현이 궁금해 하던 평양에서 말이죠.
아시안컵 예선 출전 여자 축구대표팀
어느 때보다 특별한 남북전입니다. 라은심이 궁금해하던 월드컵 무대에 오르려면 내년 아시안컵에 나가서 5위 안에 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남북전 승리로 한 장 뿐인 아시안컵 본선 티켓을 쟁취해야 합니다.

지소연은 말했습니다.

"일단 경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열심히 준비했으니 꼭 이기고 싶어요. 이기고 나면 얘기도 나누고 싶어요."

이 말에 평양에서 취재하던 공동취재단이 되물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요?”

처음에 소개한 지소연의 말은 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냐?"

"평양 밥 맛있더라."

지소연이 친분이 있는 북한의 허은별, 김은향 등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장 조소현은 출국 전 "(라)은심이가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시상식 때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기대했습니다.

저 역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5년 중국 우한(동아시안컵), 2016년 일본 오사카(리우 올림픽 예선)에서 빠지지 않고 만났던 김광민 북한 여자 대표팀 감독을 이번에는 평양에 가지 못해 만날 수 없어 아쉬웠던 터라 조금은 선수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라운드 위에서 직접 몸을 부닥친 선수들 심정에 비하기 어려울 테지만요.

중계 화면으로 남북 대결 모습을 볼 수 없어 경기 소식이 무척 궁금하지만 평양에서도 남과 북 선수들이 반갑게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소식이 꼭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 선수들이 마음 편히 수다를 떨 날은 언제쯤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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