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묻지마 살처분 안돼요"

[취재파일]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묻지마 살처분 안돼요"
전북 익산에서 산란계를 키우는 임 모씨는 3주 째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애지중지하게 키운 닭을 살 처분 하겠다며 언제 공권력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임씨에게는 지난 10일 익산시로부터 예방적 살처분 명령서가 전달됐다. 이달 초 2.1km 떨어진 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했고, 임씨 농장이 예방적 살처분 범위인 발생 농가로부터 반경 3km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에서다.

임 씨는 아무런 증상도 없는 멀쩡한 닭을 묻을 수는 없다며 농장주 유 모씨 명의로 법원에 살처분 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살처분 명령을 거부하고 법원에 심판을 요청한 첫 사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농장은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곳이다. 닭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좁은 닭장 대신 농장 안에 풀어놓고 사육하는 방식을 택했다.

임 씨는 다른 농장 닭들보다 면역력이 강해져서 AI를 이겨낼 것이라는 확신에 지난 13일 소송을 냈다. 2.1km 떨어진 농장에서 AI가 발생한 지 7일이 지난 시점 이었지만 임씨 농장 산란계들은 AI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았고, 별다른 증상도 없이 건강한 상태였다.

이런 내용을 상세히 적어 법원에 제출했다. AI감염이 확인될 경우 살처분에 협조하겠지만 건강한 닭들을 무조건 땅에 묻을 수는 없다는 게 임씨의 일관된 주장이다. 임씨와 소송을 낸 유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렸다.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
하지만 실낱같던 희망은 끝내 허망한 결과로 돌아왔다. 전주지방법원은 28일 살처분 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해 자치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신청인이 입게 될 손해는 금전으로 보상이 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며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거나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그 집행 또는 절차를 정지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 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익산시 등이 제출한 소명자료에 따르면 집행정지 때문에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판단에는 십 수년 째 계속되고 있는 AI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인 공장식 밀식 사육방식의 문제점이나 무조건적인 예방적 살처분의 효과와 정당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법원의 결정이 난 날은 이 농장에 영향을 준 근처 농장에서 AI가 발생 한지 22일 째 되는 날이다. AI의 잠복기는 21일다. 임씨의 산란계 농장 닭들은 잠복기가 지났지만 다들 건강하고 무사하다.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
법원의 결정이 떨어지자 익산시는 기다렸다는 듯 산란계 농장으로 달려갔다. 살처분 할 명분이 생겼으니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농장 주인은 법원 판단과 별개로 AI잠복기가 지나도록 아무런 증상 없이 닭들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며 살처분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잠복기란 동물 몸속에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가 침입해 감염이 된 뒤 최초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때문에 잠복기가 지나도록 아무런 증상이 없다는 것은 병원체가 침입하지 않았거나 설사 침입했더라도 면역력으로 이겨낸 것으로 봐야한다.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
이 농장은 2천 제곱미터 규모의 비닐하우스 두 동에서 산란계 5천 마리를 밀식 사육이 아니라 농장에 풀어놓고 키우고 있다. 닭들이 쉴만한 횃대도 설치돼있고, 굵은 플라스틱 통으로 알 낳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놨다.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에서 산란을 하는 닭의 특성을 고려한 조치다.

만일 이 정도 공간에서 비좁은 닭장을 설치해 밀식 사육을 한다면 5천 마리의 10배 규모인 5만 마리도 사육이 가능하다고 양계 농민들은 말한다. 이 농장은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동물복지 인증을 받았다. 친환경 사료와 영양제도 먹이며 산란계들의 면역력을 키워왔다고 농장 주인은 말한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영양분 섭취가 잘 이루어져서 닭들이 건강하고 알도 잘 낳고 있다며 주인은 친환경 사육방식이 지금까지 AI를 이겨낸 가장 큰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농장 주인은 29일 자체적으로 실시한 AI간이 검사에서도 음성이 나왔다고 말했다.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
예방적 살처분 범위 안에 있는 농장에서 AI 잠복기가 지났지만 닭들이 어떠한 증세도 보이지 않고 무사하다는 것은 전국에서 처음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치단체나 농림축산식품부는 그냥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한 반응이다.

살처분 명령을 내린 익산시는 법원 결정이 났으니 당초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태도다. 농장 주인을 설득해 협조를 구하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잠복기가 지났어도 그 농장 주변에서 언제 AI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살처분을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잠복기란 규정을 두고 방역 대책을 세워 실행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또 AI는 국내에서도 거의 매년 되풀이돼 토착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익산시의 주장은 아예 양계를 포기하라는 식의 억지 논리일 뿐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살처분 명령은 자치단체의 전적인 권한이라며 잠복기가 지난 농장의 살처분 취소 가능 여부는 말할 수 없다며 답을 회피하고 책임을 미뤘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공고한 ‘조류인플루엔자 방역실시요령’에는 <살처분>조치가 모두 끝난 날부터 21일이 경과된 후 보호 지역과 관리 지역을 예찰지역으로 전환하도록 돼있다.

또 살처분 명령은 시장.군수에게 있지만 농림축산식품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축전염병예방법에는 바이러스의 확산이 우려될 경우 농림축산식품부가 가축방역협의회를 열어 반경 3km까지 살처분이 가능하도록 결정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자치단체가 살처분 명령을 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익산 산란계 농장은 예방적 살처분을 거부하고 AI잠복기를 무사히 넘긴 첫 사례다. 정부가 AI발생 원인을 찾고 방역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 모델로 활용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십 수년 째 되풀이돼온 AI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관습, 관행적인 살처분 조치가 전부였다. 감염원을 야생 철새로만 볼 뿐 양계 농장에 어떻게 전파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역학 조사도 거의 없다. 전염병은 사후약방문식 대처가 아니라 예방이 훨씬 중요하다.
정부, 지자체 AI 잠복기 무시
전문가들은 국내 양계, 오리 농장들이 AI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공장식 밀식 사육으로 인한 면역력 결핍과 스트레스에 있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이제 묻지마식 살처분의 관행에서 벗어나 전문가들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출발은 익산 산란계 농장이 돼야 한다. 철저한 농가 방역과 친환경 사육으로 AI를 물리친 농장을 살처분 한다는 것은 탁상행정이고 방역 대책을 스스로 무시하는 꼴이다. 혁신에 맞서는 수구 행정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