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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걸으며 역사를 듣다 - 남한산성(南漢山城) 둘레길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걸어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임금은 새벽에 남한산성에 들었다."
- (김훈, <남한산성>)


먼 병자(丙子)년, 강화도로 파천(播遷)하려던 왕은 청((淸) 군사에 의해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엄동설한에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천혜의 요새라던 남한산성마저도 일신의 안녕을 걱정하던 왕을 지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은 고작 한 달 반 만에 산성의 서문(西門)을 통해 밖으로 나와, 적장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항복을 표하며 목숨을 보존하였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청나라의 의식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통일신라 시대의 주장성이라고도 하는, 길게는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이 세상과 역사에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아쉽게도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인조가 피신하면서부터이다.

왕이 성에 머무른 날은 고작 47일. 하지만 산성(山城)의 운명은 성이 살아낸 2천 년이 아닌 47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의해 규정되고 말았다. 수많은 외침을 당한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인 병자호란의 산증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남한산성 가는 길은 역사의 흔적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남한산성 둘레길을 걸으러 가던 날은 인조가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던, 몸서리쳐지게 춥던 동짓달의 그 날과는 달랐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3월의 봄날은 품은 햇살을 산성 곳곳에다 흩뿌리고 있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다섯 개의 코스가 산성 곳곳으로 이어져 있다. 어느 길을 걸어도 좋다. 산성 지도를 뒤적이다, 시간 제약으로 북문을 시작으로 서문, 수어장대를 지나 남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아 걷기로 했다.

남문 주차장을 벗어나, 길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문이 보인다.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성문(城門)은 산세와 지형의 영향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형상을 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두고 있다. 그 중 북문은 성곽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위치한다.

병자호란 당시 북문을 통해 300여 명의 군사들이 청나라군을 기습공격 했으나, 적의 매복 공격에 전멸당했다 . 훗날 ‘법화골 전투’로 불리는 전투다. 이런 아픔이 서려 있는 북문을 정조 때 개축하면서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기원을 담아 전승문(戰勝門)이란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성을 둘러 길은 넓었고, 사람들은 한가로웠다.
북문을 지나자, 봄 햇살이 비치는 길은 널찍했고, 평일 낮의 한가로움은 길 위에서도 아지랑이처럼 피어져 나왔다. 걷는 이들은 더러는 등산복을 차려입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편한 복장으로 마실 나온 사람들처럼 한가롭고, 또 여유로워 보였다. 

남한산성(山城)은 오랜 세월 동안 풍상(風箱)을 겪었는데도 옛날 모습을 대체로 간직한 채 그곳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남한산성은 전체 길이가 11.76km에 이르고, 넓이는 2.3㎢로, 내부가 평탄하고 수량이 풍부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로 큰 규모의 산성이다. 본성은 인조 2년에 통일신라 시대 주장성의 성 돌을 활용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성곽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져 있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1963년 1월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고, 그 결과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룬다.

그렇게 남한산성은 역사의 현장으로, 도시인들에겐 비교적 가까이에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쉼터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둘레길에는 오랜 세월을 산성과 더불어 영광과 아픔을 함께 했던 그 옛날의 나무들과 더불어 걷는 즐거움이 있다. 산성의 버팀목이자 그늘막이 되어주는 소나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솔 향기 속에는 그윽하면서도 아픈 역사의 향기가 스며있는 듯하다.
이 소나무는 병자년의 굴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병자년에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힘을 모아 적과 대적하던 민초들의 피와 땀 냄새가 배어 있는 듯도 하고, 추운 겨울바람에 호호 손발 불어가며 창검을 쥐고 망루를 지키던 병사들의 절망의 신음소리도 있는 듯하다.

적을 앞에 두고도 벼슬아치들이 주전론이니 주화론이니 논쟁만을 일삼는 동안, 민초들과 힘없는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맨몸으로 적들의 수만의 말발굽 소리에 맞서야 했으니 그 두려움과 절망이 또 얼마였을 것인가. 

길게 늘어선 성벽의 총안(銃眼)에는 그날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잡초만이 오늘의 마을을 굽어볼 뿐이었다.
성벽의 총안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성벽은 소나무들의 사열을 받으며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성(城)은 안과 밖을 경계 지으며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兩者)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다.

우리는 역사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으며, 또 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또 현재를 통해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과거는 현재를 위한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기는 한 건가?

국정농단 사태와 세월호, 대통령 선거라는 격랑의 뉴스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남한산성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2천 년을 넘게 버텨온 산성.
성벽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를 발견하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저 멀리 암문(暗門)이 보인다. 제5 암문이다.
제 5 암문(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이면서, 본성과 옹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말한다. 옹성은 본성을 방어하기 위해 본성 둘레에 쌓거나, 성 밖으로 줄기 모양으로 내어 만든 작은 성이다. 제 5암문은 본성인 남한산성과 연주봉 옹성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연주봉 옹성에 오르면 광주와 하남, 서울의 송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연주봉 옹성은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연주봉 옹성에 오르면 광주와 하남, 서울의 송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송파가 병자호란의 굴욕의 장소인 삼전도다. 삼전도는 송파구 삼전동으로 아직도 그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곳(현재는 잠실)에 삼전도의 굴욕이 기록되어 있는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라 불리는 삼전도비가 있다.
성 밖으로 병자년 굴욕의 장소인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 일대)가 보인다.
얼마가지 않아 우익문(右翼門)이라 불리는 남한산성 서문이 보인다. 인조가 항복을 위해 남한산성을 나서던 문이다. 송파나루에 진을 치고 있던 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인조를 그 곳으로 불렀고, 인조는 그 곳으로 가는 지름길인 서문을 통해 산성을 나왔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남한산성 서문이 멀리 보인다.
왜 인조의 조선은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까?

시작은 이렇다. 1616년 만주의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립한다. 이때가 광해군 시절이다.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부흥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일명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외교술을 구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광해군은 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인조를 앞세워 반정에 성공한 서인 정권이 들어선다. 이들은 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후금을 오랑캐라 칭하고 후금과의 적대 관계를 공식화한다. 

명나라를 도모해야 할 후금 입장에서는 후금의 후방에 속하는 조선은 군사전략적으로도 골치 덩어리였고, 또 드러내놓고 배금을 선언하고 적대시하니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정묘호란이다. 그 당시 조선을 겁주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목적만 있었던 후금은 조선을 침략한 지 두 달 만에 강화도로 도망간 인조와 화의를 맺고 전쟁을 휴전한다.
 아직도 서문에는 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후 국력이 커지고 자신감이 붙자 2대 왕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반청(反淸) 노선을 지속하는 조선에게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양국관계를 재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오랑캐로 여기는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라는 그들의 요구는 당시 집권세력에게는 언어도단이었다. 그러니 조선은 당연히 청의 요구 내지 협박을 수용할 수 없었다. 신하들은 청의 요구에 주전론(主戰論)을 앞세웠고,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병자호란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전론을 외치던 조선의 왕과 신하는 전쟁 발발 석 달 만에 엄동설한의 맨 땅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ICBM 같은 크루즈 미사일이나 전략 핵폭격기가 날아다니는 현대도 아니고, 말 타고 달리던 그 시절에 어이없게도 고작 석 달 만에 전쟁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항복이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10년이고, 주전론이 들끓던 나라에서 정작 전쟁 준비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조의 나라였다. 그들은 정묘호란의 패퇴 속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그러니 당연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책임하게도 전쟁을 부르짖으며 ’싸우자’는 구호만 외쳐댔던 것이다.

나라가 어찌 되든,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왕과 벼슬아치들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명분만을 고집하면서 섶을 지고 전쟁이라는 불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비현실적인 맹목적 사대주의의 결과는 참혹했다.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농성하는 동안, 민초들과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 나갔다. 애초에 조선의 군대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도망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왕과 벼슬아치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당연한 비극이었던 것이다.
성은 누란의 위기에도 살아남았다.
당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군사가 1만 2천여 명, 그리고 수만의 백성들…성 밖의 수백만의 백성들은 고사하고, 성 안의 수만의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준비조차도 전혀 없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나중에는 인조조차도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요즘 말로 ‘이게 나랴냐?’고 조롱당할 만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원군과 군수물자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인조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허망한 패배의 소식뿐이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경상도 병력은 북상중 맞닥뜨린 ‘쌍령 전투’에서, 수만 명의 군사로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수백의 적 기병에게 대패하였으며, 그야말로 요새 중의 요새라 믿었던 강화도마저 함락돼 수많은 대신과 대군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 와중에도 벼슬아치들은 주전론이니 주화론이니 논쟁이 그치질 않았다.

김상헌과 그 일파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주장을 해대면서 화의를 주장하는 최명길 등 주화론자들을 공격한다. 그들에게는 백성이 굶어 죽어도, 병사들이 얼어 죽어도, 나라의 강토가 청의 말발굽 아래 쑥대밭이 되어도, 명나라에 대한 신의와 명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왕이 항복을 결정하고,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쓴다.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김훈, <남한산성>)


김상헌의 명분은 의당 가야 할 길마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길이 모두가 ‘살’ 길임에도 김상헌은 살 길에 눈 감고 죽는 길을 가자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항복문서를 찢기도 하고 자살 시늉까지 하며 항복에 반대했다. 하지만 나중에 주전론을 펼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나라에 끌려가 죽을 때, 김상헌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청나라에서 풀려난 그는 정승을 제수받기도 하고, 그의 자손들은 자자손손 번성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서 김상헌은 지조 높은 충신이었다. 역사마저도 그에게 무지하고 맹목적인 사대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은 우국충정을 노래한 절창(絶唱)으로 대우받으며, 우리가 외우고 배워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우리는 그렇게 배워야 했을까?
남한산성 서문의 작은 통로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은 삼전도로 이어진다.
인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그 때에 산에서 내려왔다. 머리를 땅에 찧고, 대군들과 신하, 그리고 수십만 명의 백성들을 청에 내어준 다음에야 그는 목숨을 부지하고, 밥을 목구멍에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청나라에서 어렵사리 도망쳐온 백성들은 ‘호로자식(胡虜者)’이 되어야 했고 ‘화냥년(還鄕女)’이 되어야 했지만, 왕은 그 후로도 13년을 더 보위를 유지하며, 그 보위를 잃을까봐 유배지(심양)에서 돌아온 그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기까지 한다. 청나라에 우호적이었던 소현세자가 역모를 꾸밀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덕일, <조선왕 독살사건>)
오래된 나무들은 성벽을 따라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그 사잇길을 지난다.
인조는 한 명의 어리석은 군주가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리고, 백성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 

병자호란 이후 근 400년이 지난 지금 남한산성을 걸으며 인조의 모습 위에 이제 전(前)자를 붙인 어느 지도자가 겹쳐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역사의 강물은 곧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성벽처럼 더러는 구부리고 돌아서도 흘러간다.
어찌 되었건 그 전(前) 지도자는 탄핵됐고, 5월이면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나? 훌륭한 지도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한다. 실패의 역사에서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도자의 잘못이 아닌 그런 지도자를 뽑은 국민들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수어장대.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다행인 것은 저 멀리 봄 햇살 너머로 아스라이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희망이 너울대고 있음을 발견한다. 희망은 보려는 사람에게 보이는 법이다.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천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희망마저도 보려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법이다.
멀리 남문이 보인다. 오늘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준비가 덜 된 탓에 남한산성 둘레길을 완주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머지않은 때에 오늘 다 듣지 못한 남한산성의 이야기, 그 역사 이야기를 들으러 다시 또 와야만 할 것 같다.

*** 남한산성 가는 길

◎ 지하철 : 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 후 9번 버스를 이용.
             5호선 마천역에서 하차 후 남한산성 가는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남한산성 서문 도착.

◎ 승용차 : 남문주차장이나 로터리주차장, 중앙주차장 등 여러 곳의 주차장을 이용 가능
             주차 요금은 1일 1천원으로 저렴한 편.    

  ※ 이 글을 읽고 독자분이 다음과 같이 남한산성 가는 버스 꿀팁을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중교통 이용시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52번, 9번, 9-1번 버스 타시면
      남한산성 안 마을까지 이동가능합니다.
      52번은 배차간격이 너무 길고
      9번은 산성역에서 바로 남한산성으로 직행하는게 아니라 을지대 쪽 동네를 한바퀴 뱅 돌구요,
      9-1번은 휴일에만 운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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