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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84 : 복종하거나 복종하지 않거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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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자주 침묵했던가. 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가만히 있었는가? 작은 뜨거운 점들은 우리 안에서 돌아다닌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밝게 빛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빛을 잃는다."

2017년 3월 12일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촛불과 태극기로 대표되는 양대 세력의 분포나 대통령 탄핵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만 어떤 결과라도 한국이 아직 이 정도..라는 것 아닌가 합니다. 너무 관조적인가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죠. 홀로코스트 같은 대학살을 실행한 이들도, 대단한 악인이 아니라 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갑자기 비약하는 게 아니라, 이번 사태의 결과에서도, 그게 지금 우리가 와 있는 지점 같다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최근 다시 집어 든 책 덕분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모처럼 들른 서점에서 아직 주요 자리에 진열돼 있는 걸 보고 다시 읽었습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작가 로렌 슬레이터가 쓴 스테디셀러입니다. 

이 책에는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제목처럼, 스키너를 비롯해 밀그램이나 할로, 페스팅거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 심리학자와 심리학 실험에 관한 이야기 10편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든가, 철사 원숭이 실험, 가짜 기억 이식 실험 등 이름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실험 이야기가 많은데, 스키너의 상자 실험 편은 좀 아껴두고 "2장 사람은 왜 불합리한 권위 앞에 복종하는가" 밀그램의 실험에 대한 장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의 예측은 모두 같았다. 결코 충격을 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비명을 지를 경우 충격을 가하는 사람이 병적인 사디스트가 아닌 이상 높아봤자 150볼트에서 멈출 것이라고 응답했다. 밀그래의 실험 결과가 밝혀진 지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러분도 똑같다."

"작고 뜨거운 점들은 우리 안에서 돌아다닌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밝게 빛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빛을 잃는다. 하지만 도덕적 실패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많은 실패를 하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 


다음 실험과 관련해 저도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작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놓고 자고 있는데 새벽 3시나 4시쯤이었을까요, 창밖에서 갑자기 '사람 살려'라는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아파트 3층에 사는 저에겐 더 잘 들렸죠. 잠에서 깨 '잘못 들은 건가' 싶었는데 다시 비명소리가 들렸고 창밖을 내다봤더니 누가 달아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알고 보니 밤늦게 귀가하던 여성을 뒤에서 어떤 남성이 덮쳤고 그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자 이 남성이 도망친 겁니다. 누군가 신고했는지 경찰이 출동했고 범인도 근방에서 붙잡혔습니다. 그 여성에겐 천만다행으로 어디서 나왔는지 사람들 몇이 나와 그 여성을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저 여성이 비명을 질렀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요. 3층에서 지켜보던 저는 어떤 행동을 더 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3장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침묵한 38명의 증인들'을 읽겠습니다.

"살인 사건은 새벽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 일어났다. 세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은 도움을 청하는 비명에 중간중간 끊겼다. 집 안 전등을 켜고 구경을 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목격하고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 여성이 칼에 찔리고 쓰러지는 것을 창가에서 구경만 한 사람들은 모두 38명이었다. "

"책임감 분산이 사회적 예절과 결합하게 되면 그것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생사가 걸린 상황도 무시하게 된다. 가해자는 단 한 명뿐인데도 대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뿐만 아니라 비상사태가 실제 상황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제노비스 살인 사건의 한 증인은 연인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심리학을 좀 아는 분들이라면 이 책에 나온 실험이 워낙 유명하고 오래된 실험들이라 어떤 맹점이 있는지, 이후엔 더 어떤 설득력 있는 이론들이 제시됐는지를 말씀하시겠지요. 저는 물론 그 이후를 잘 모릅니다만, 저자가 머리말에서 쓴, 심리실험에 대한 이런 통찰에는 200% 공감합니다. 잠깐 읽어볼게요.

"훌륭한 심리실험은 인간의 경험을 압축시켜 우아한 본질만 남도록 걸러낸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의 각 요소들을 정상적으로 조합하여 특정하게 설정된 상황에서 사랑과 두려움과 순응과 소심함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분석하는 상징적 의미의 실험관이기도 하다. 위대한 심리실험은 인간의 특정 행동 영역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혼잡한 인생 속에 묻혀 있는 한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렌즈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인간은 조건화되고, 밝혀지고 해방되고 설명된다. 누군가는 명령을 내리지만, 우리는 복종하거나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 에코의 서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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