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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몇 학번이세요?" '학번' 묻는 사회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몇 학번이세요?”입니다.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별 뜻 없이 주고받게 되는 문답이지만 사실 이 질문에는 한가지 전제가 달려 있습니다.

"당연히 대학은 나오셨겠죠, 뭐."
졸업하는 대학생
● '신분제'의 또 다른 이름, 대학

공부에 지친 아이들은 종종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좋은 대학 가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어른들의 모범답안입니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과 좋은 혼처를 다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그런 것들을 얻기가 몇 배 더 어려운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학력 사회는 대학을 일종의 사회적 계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대졸과 고졸. 대졸은 다시 4년제와 2년제. 4년제는 다시 일류대와 이류대, 삼류대 등등.. 단계도 많습니다. 취업 면접 때 아무리 학력과 무관하게 심사를 본다고 해도 결국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에 따른 차별은 분명 존재합니다.

문제는 대학 학력도 점차 세습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학력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공부도 더 잘하는 게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공교육 붕괴 탓입니다. 사교육이 대학 입시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고학력 부모의 수입이 더 좋게 마련이고 그런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사교육에 더 많은 돈을 쓰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 학번으로 '알고 싶은 것' vs '알 수 있는 것'

대학을 나왔다고 학번을 말하는 게 꼭 자연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보통 “XX 학번입니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들은 응당 그 학번에 맞는 나이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학 입시 때 재수, 삼수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뭐 “재수 XX 학번입니다”, 혹은 “삼수 XX 학번입니다”라고 답하면 그뿐이지만 사족을 붙여야 하는 상황이 굳이 유쾌할 리 없습니다.

사실 초면에 학번을 묻는 이유는 대부분 ‘나이’ 때문입니다. “몇 살이세요?”라고 직접 묻기가 멋쩍어 “몇 학번이세요?”라고 묻는 겁니다. 묻는 의도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그런 인식 자체는 다시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나 학번을 묻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고 또 질문의 목적인 나이 확인이 학번으로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말입니다.

학번이 꼭 필요한 경우는 같은 대학 동문 사이 정도일 겁니다. 동문이니 선후배 관계도 파악할 겸 물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대학도 아닌데 자기보다 학번이 높은지 낮은지 확인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 '학력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작은 습관
대학생들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일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학번을 묻는다고 해도 크게 실수할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학력 사회가 아니라 능력이 인정 받는 사회입니다.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이런 작은 습관 하나가 이를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아빠 대학 안 나왔어?”라는 말이 상처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독일 같은 직업 문화가 정착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파하자고 외치는 ‘학력 사회’, ‘학력 인플레’가 정치인의 거창한 공약이나 정부의 정책만으로 달성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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