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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악마는 종합대책에 있다?'

알맹이 없는 백화점식 종합대책 언제까지…정부 정책에도 '선택과 집중'을

[취재파일] '악마는 종합대책에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제(27일) "우리 경제·사회의 전반적인 혁신을 포괄하는 '4차 산업혁명 종합대책'을 4월 중 마련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해주길 바란다"고 공무원들에게 주문했습니다.
 
유 부총리가 한 달여 만에 대책을 만들어달라는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데이터기술(빅데이터, 5G, 클라우드, 모바일, IoT 등)이 전 산업 분야에 적용돼 경제와 사회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기술혁명, 제조업과 정보통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구분은 무의미해지는, 그 엄청난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것이겠죠. 세계 경제의 불황을 타개할 탈출구로서 전 세계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에 나서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그야말로 요즘 '화두'입니다. 모든 대선주자들이 4차산업 대책을 들고 나왔고, 본인이 4차 산업에 적임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이미 4차 산업 경쟁력에서 세계 25위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미래 뭘 먹고 살지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 부총리는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그런 거대한 주제를 '종합대책'으로, 한 달여 만에 뚝딱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유 부총리 주문대로 우리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혁신을 포괄하는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종합대책'이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를 하기엔 그동안 우리 정부의 '종합대책'은 그야말로 너무 '종합적'입니다.
 
빈도도 잦습니다. 경제 상황이 어렵고 정부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져서일까요.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일까요. 요즘 너무 '종합대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내수활성화 대책, 수출확대 방안, 투자 활성화 대책, 규제혁신 국민대토론회, 이름은 살짝 차이가 있지만 모두 몇십 페이지 각 부처를 망라하는 종합대책을 담고 있습니다.
여행객들로 붐비는 인천공항
내수 활성화 대책은 왜 사람들이 자꾸 해외여행으로 몰릴까, 내수는 부진한 데, 외국에 나가 쓰는 돈은 자꾸 늘어나니 이걸 국내로 돌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습니다. 월부터 목요일까지 30분씩 더 일하고 금요일에 2시간 일찍 퇴근해 주말까지 죽 휴가를 즐기며 돈을 쓰도록 하자는 아이디어, 봄철 여행주간을 지난해보다 무려 '이틀'이나 늘리자(그런데 정작 문제는 봄철 여행주간이 있는지, 여행주간을 이용하면 뭐가 혜택이 있는 건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KTX 할인해주자, 호텔 객실요금 내리면 재산세 깎아주자, 청탁금지법 피해 업종에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자 등 100여 개나 되는 대책이 총망라돼있습니다. 말이 내수활성화 대책이지 고용지원, 자영업자 지원, 저소득층 지원, 전셋값 상승 억제책, 유류세 환급 등 서민대책 종합입니다. 결국 생활비를 아껴주고, 더 돈을 쓸 계기와 시간을 만들어주면 내수를 늘릴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정시퇴근도 못 하는데 2시간 일찍?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도 못 쓰는데, 강제를 하지 않고 어떤 기업에서 원활하게 이 제도를 시행할까?”하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이런 반응은 내수부진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들어서도 도통 소비가 살아나지 않자 정부의 고민이 커진 것은 이해합니다. 2%대 저성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수출은 그나마 회복 불씨를 보이고 있는데, 소비 위축은 생각보다 더 심각합니다. 정부는 이렇게 소비 부진이 지속되면 올해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정부 예상치보다도 못해 '소비 위축→생산 감소→고용 악화→내수 둔화'의 악순환 구도가 심화될 수 있다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를 못 하는 이유는 쓸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쓸 돈이 없어서라는 쪽이 우세합니다. 결국 여윳돈을 만들어줘야, 실질소득을 높여줘야 돈을 더 쓰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실질임금은 늘어날 기미를 안 보이고, 생활물가는 오르고, 가계부채는 계속 늘어 이자 부담은 커지고, 게다가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주체들의 심리는 최대로 위축돼있는 상황입니다.
 
투자활성화대책도 마찬가지 평가입니다. 기존대책을 모두 정리해 놓은, 백화점식 나열, 깊이는 없고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양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다, 각 부처에서 모으다 보니 내용은 나열식으로 다 들어가있는데 임팩트가 덜하다"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현 정부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돼있습니다. 불안정한 상황이 몇 개월째 지속되고 향후 대선일정 등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추진할 동력이 없는데 새 아이디어를 굳이 지금 대책에 넣고 싶은 공무원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기존에 내놓은 대책, 연초 업무보고 계획 등에서 관련 있는 것들을 다시 재탕, 삼탕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리더십 실종이 가져오는 손실은 국가적으로 이렇게 큽니다.
경제관계장관회의 (사진=연합뉴스)
제가 출입하고 있는 모 부처의 공무원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황교안 권한대행이 회의를 너무 많이 하는데 대한 부작용도 크다는 것입니다. 국정 공백을 줄여야 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보여주기식 불필요한 회의도 많다고 말입니다.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 ‘신산업 규제혁신 관계장관회의’, ‘창업활성화 관계장관회의’ 등, 각 부처는 해당자료 만들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규제개혁 관계장관회의를 하고 또 신산업 규제혁신 관계장관회의도, 별로 차이가 없는데 따로 떼어서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걸 뭐라 하겠냐마는 회의의 실효성을 따져봐야 합니다. 종합대책만 줄줄이 나열하는 동안 정말 챙겨야 하는 핵심적인 내용, 이것만은 고치고 넘어가야 하는 급박한 부분은 묻히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말이 있죠. 작은 일이 자칫 큰 일을 망칠 수 있으니 세세한 것도 잘 챙겨야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계속되는 정부 종합대책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반대 생각이 듭니다. '악마는 종합대책에 있다'고나 할까요.
종합대책 몇십 페이지, 몇백 개 정책 백화점식으로 나열해놓고 우리는 이렇게 다 챙기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결과는 그대로이거나 후퇴하거나 중요한 핵심 정책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세상의 변화속도도 빠릅니다. 트럼프의 미국이 무역정책에 미치는 포괄적 영향에서 보듯, 우리를 둘러싼 대외적 요인도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정부 대책은 항상 종합대책일 필요가 있을까요. 연초 업무보고 정도만 포괄적 방향 설정을 하는 종합대책으로 가고, 각각 중요한 것은 ‘정말 이것만은 바꾸겠다’, 선택과 집중으로 가는 게 국민들에게 더 와 닿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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