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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82 : 천국 가려면 어쩌라고?…'독서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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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가장 접근하기 쉽고 믿을 만한 지식의 원전은 책이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돈이 되지는 않는다'라는 명제는 다시 쓰여야 한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책으로 뒤덮여 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책은, 혹은 가슴에 챙긴 글의 구절이 있으신가요? 저부터가 이런 질문을 갑자기 받는다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직업 특성상 매일 같이 수백 줄의 기사를 읽고 수많은 텍스트를 생산하고 소비합니다-생산과 소비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네요, 쓰고 읽습니다. 나이 들면서 머리가 둔해져서도 그렇지만 잘 마음에 남진 않습니다. 때로는 책 그 자체만 남기도 합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오래돼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격언이 꽤 맞는 말 같습니다. 기사만 읽고 자료만 읽고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간이 얼마간 지속되면 마음이 헛헛하기도 하니까요. 
 
책 읽고 책 수집하고 책 나눠주고 책과 함께 수십 년 살아와 '책에 미친 남자'라고도 하는 이가 쓴 책 이야기를 읽습니다. 오늘 읽을 책의 제목은 [독서만담]입니다. 
 
저자는 독서가이면서 책 수집가이기도 합니다. 생업으로는 교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수집도 마찬가지겠지만 책 수집도 희귀본, 절판본이라면 더욱 가치가 올라가고 더더욱 갖고 싶겠죠. 고상하게 고담준론을 주고받으며 책을 주고받기만은 하지 않는 듯합니다. 제목 그대로 '만담' 같기도 합니다. 책 수집의 지질함을 보여주는 글 몇 편을 먼저 읽겠습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서점을 운영하는 시바타 신이 미시마 유키오의 저작물을 출간하는 고댠사에 현금을 들고 달려갔다는 이야기다. 자살하면 그의 책이 불티나듯이 잘 팔릴 터이니 미리 현금을 주고 그의 책을 확보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장서가의 자식들은 돈의 분배로만 싸우지 장서를 가지고 싸우지는 않는다. 물론 그 장서가 문화재급의 희귀본이어서 '돈이 되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장서를 의도치 않게 떠안은 자식들은 대개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무게를 달아 팔아넘긴다. 장서 수가 많지 않다면 재활용 상자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헌책이나 희귀본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대박 기회는 다른 교양 있는 장서가의 죽음이다."
 
"이 책이 귀하게 여겨진 만큼 헌책 수집가에게는 '로망'이었고 존재조차 희미한 '신기루'에 가까웠다. 그런데 개인 간 헌책 거래 사이트에 이 책이 매물로 떴다. 더구나 판매 가격이 기절초풍할 만했다. 단돈 500원에 팔겠다는 것이다.... 희대의 희귀본을 단돈 500원에 팔겠다는 그 판매자는 순식간에 슈퍼 울트라급 엔젤로 숭상되었고 헌책 수집계의 '간디'로 인정받았다... 가격이 500원이 맞긴 하지만 보통의 500원짜리 동전이 아닌 반드시 1998년 산 500원짜리 동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매자에 따르면 1998년 산이면서 상태가 상급이면 3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유사하고 역시 지질한 경험 하나 고백합니다. 10여 년 전 그리스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동료가 부탁을 해왔습니다. 이 동료는 당시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수집가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움베르트 에코 마니아였는데 전 세계 각종 언어로 번역된 [장미의 이름]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어판을 사다 달라는 부탁이었죠. 여러 모로 바쁜 와중에 이 부탁이 생각나 구입은 했는데 책이 굉장히 예쁘고 멋지게 장정돼 있는 겁니다. 다시 서점에 들를 여유는 없어 더 살 수도 없었고 결국 한국에 돌아와 책을 못 샀다고 거짓말하고는 그 책을 제가 가졌습니다. 이렇게나마 고백하니 죄책감이 조금 덜어질까요. 풍문으로 다행히 그리스어 판을 구했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책장 한 구석에 그 책이 꽂혀 있습니다. 거의 꺼내 본 일이 없습니다. 책장 여럿이 서 있는 방의 그 구석을 굳이 이름 붙이면 제 서재라고 할 수도 있겠죠. 서재와 책 다루는 방식으로 나눈 육체파와 정신파, 책의 다양한 용도에 관한 글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함부로 다룬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심지어는 침을 묻혀가면서 읽는다. 또 읽다가 멈출 때는 스스럼없이 다음에 읽어야 할 부분을 접는다.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마치 보물처럼 다룬다... 얼마 전 책을 접어가면서 읽는 '학대'를 하다가 순도 백 퍼센트의 플라토닉 사랑꾼에게 왜 대체 책을 그렇게 험하게 다루느냐는 엄중한 꾸중을 들었다... 억울함이 샘솟았다. 연인을 사랑하는 방식이 각자 다른 것처러 책을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도 존중받아야 한다." 
 
"책을 수면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많다... 얇은 책이 좋다. 책을 읽다가 졸음이 쏟아질 때 언제든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아도 몸을 뒤척일 때 걸리적거려서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이도는 어려운 게 좋다. 너무 이해가 쏙쏙 잘되는 나머지 지적 욕구가 불타올라 잠이 달아나서는 곤란하다. 성석제나 천명관 같은 작가의 책을 수면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책은 너무 웃기고 재미있어서 오히려 수면을 방해하는 역효과가 난다."

 
이렇게 책에 몰두한 삶을 수십 년 살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저자는 이런저런 갈등을 어떻게든 잘 해결하면서 책과 함께 하는 삶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의 앞부분은 전반적인 책과 함께 한 삶에 대해, 뒤로 가면 몇몇 책들을 소개하는 형식의 글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책의 소개를 길잡이 삼아 여기 소개된 책들로 이어가면서 독서하는 재미도 있겠습니다. 일전에 한창 책 많이 읽던 시절에는, 한 저자에게 꽂히면 그 저자의 책을 전부 구해보는 식으로 욕심을 부리기도 했는데 요즘엔 이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에서 또 다른 책으로, 인터넷 링크 타고 가듯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독서도 재미난 듯합니다. '북적북적'이 그런 계기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러면 참 좋겠습니다.
 
(출판사 북바이북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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