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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친박(親朴)의 사상(思想)

④ 대한민국 보수주의, 친박(親朴)의 보수주의

[취재파일] 친박(親朴)의 사상(思想)
- ① 사드를 통해 본 친박(親朴)의 안보관
- ② 당청 관계를 통해 본 친박(親朴)의 민주주의
- ③ 국정 교과서를 통해 본 친박(親朴)의 역사관
- ④ 대한민국 보수주의, 친박(親朴)의 보수주의

프랑스혁명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가운데 가장 경악스러운 일이다. 경박함과 잔인함이 빚어내고 모든 종류의 죄악이 모든 종류의 어리석은 짓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이 괴상한 혼란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본성에서 벗어난 듯싶다.
-에드문드 버크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 (1790)

역사는 프랑스 혁명의 위대함을 기억합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민주주의의 본령은 18세기 프랑스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정치인이자 철학자 에드문드 버크는 인류 희대의 업적을 경악스럽다고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반동적으로 보입니다.

● 에드문드 버크의 보수주의

하지만, 버크에게는 철학적 얼개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근대, 철학의 무게 중심이 신앙(信仰)에서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옮겨가던 역동의 시대. 버크는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사회를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인간의 자만이라며 경계했습니다. 버크가 바라본 사회는 수학 공식처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물론 전통과 습성, 충동, 본능까지 합리적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의 결합체이기도 했습니다. 버크는 권력의 주체만 바꾼다고 사회가 바뀌는 건 아니라고 봤습니다. 도덕적 성과를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버크가 개혁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비판했지만 점진적 변화에 가까웠던 영국의 명예혁명과 루터의 종교 개혁은 높게 평가했습니다. 유럽 제국주의의 발판이 됐던 동인도 회사를 두고 당시 진보주의자들과 날을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당대 진보주의자들은 동인도 회사라는 통치 시스템만 만들면, 야만적이라 여겨진 인도를 인간 이성의 힘으로 계몽시킬 수 있다고 봤습니다. 실제 밀은 동인도 회사의 관료로도 일했습니다.

하지만 버크는 반대했습니다. 인도라는 공동체의 전통을 영국이 나서 재단할 권리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이 문제 만큼은 버크의 말이 맞았습니다. 식민지 개척은 살육으로 얼룩졌고 참혹한 세계 대전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버크의 철학이 유럽의 주류가 됐다면, 인류 최악의 참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히틀러는 프랑스 혁명의 뼈대를 제공했던 장 자크 루소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철학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김성호 교수가 13년 전 한 언론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 교수가 정리한 보수주의의 4가지 특성은 버크의 보수주의 철학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습니다.

① 개혁의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그 비용을 현실적으로 따져보는 현실주의
② 해방의 명분 뒤에 숨어 있는 사익의 준동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규범적 통합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
③ 어떤 물질적, 도덕적 성과도 수단과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믿는 원칙론
④ 항상 권리 주장에 앞서 자기 의무를 돌아보는 의무론
-연세대 김성호 교수, 2004년 12월 동아일보 ‘보수의 일신(日新) 진보의 우일신(又日新)

버크는 보수주의의 원류로 평가됩니다. 18세기 근대인이라 신분제를 옹호하는 식의 구닥다리 화법도 보이지만,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은 시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의 바이블로 통합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시대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보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이 대한민국 학계에 번역된 건 2008년이었습니다. 번역자도 진보적 역사학자로 분류되는 경희대 이태숙 교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81년에 첫 번역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보수주의가 버크의 보수주의와 꼭 같을 필요는 없지만, 대한민국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지적으로 게을렀는지, 자기 성찰에 서툴렀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겁니다. 한국 보수주의 철학은 어쩌면 ‘진보에 대한 안티테제’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 친박(親朴)의 보수주의

보수의 철학적 빈곤함. 최순실 사태의 배경은 오만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부실한 철학적 뼈대가 자리합니다. 보수가 개혁의 이상에 공감했다면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이 어제 오늘 만의 일은 아닙니다. 어떤 보수주의자는 그 책임을 역사에 묻고 싶어 할 겁니다. 친박 역시 그 왜곡된 철학적 자산을 물려받은 죄밖에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수가 위기를 맞게 된 지금, 우리는 그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책임은 최근 대한민국 보수를 이끌어 왔던 친박에게 묻는 게 맞습니다.

친박(親朴)의 사상(思想). 앞서 세 편의 글에서 안보와 역사, 민주주의를 다루는 친박의 방식을 경험론적으로 접근하며, 공통된 철학을 추출하기 위해 애써봤습니다. 사상(思想)이란 말로 예우했습니다. 하지만, 친박은 보수주의의 탯줄이라 불린 안보관마저 박근혜의 뜻에 위탁했습니다. 사드가 그랬습니다. 당청 간의 건강한 긴장 관계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당헌 당규, 심지어 헌법 위에 박근혜의 뜻을 군림시켰습니다. 역사관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계파 정치의 수단으로, 다른 계파를 시험대에 올리는 충성 고사로 활용했습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그랬습니다.

친박이 말한 보수는 박근혜의 뜻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이 무너진 지금 친박도 무너졌고, 대한민국 보수주의는 갈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유년 새해. 대한민국 보수는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집안 정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인적 청산으로 다시 진통을 겪었습니다. 재정비가 말처럼 녹록치가 않습니다. 누구는 당을 나와 새집을 장만했습니다. 한국 정당사 첫 보수 정당의 분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바른정당 대권 주자인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지사는 친박과 선을 그으며 개혁의 이상을 말하고 있지만 아직 보수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수의 희망이었던 정치신인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 실험은 3주 천하로 끝났습니다. 대한민국 보수는 너무 심하게 훼손돼 재정비 작업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과연 보수는 박근혜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다시 버크를 소환합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했지만, 개혁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권위의 부침 속에 결국 대가를 치를 거란 버크의 예상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나폴레옹 시대 전제 군주의 부활로 후퇴했고, 역사는 피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혁명은 분명 위대했지만, 그 뒤안길도 있었습니다. 버크는 혁명의 뒤안길을 고민했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그 긴장감을 성찰했습니다. 이 정신이 바로 보수주의의 출발점이며 본질이었습니다.

4.19 혁명으로 첫 단추를 꿰었던 대한민국 현대사. 하지만 5.16과 유신, 그리고 군부 독재로 이어졌습니다. 1987년 6월 혁명의 결과는 3당 합당과 군사 정권의 연장으로 귀결됐습니다. 대한민국 보수를 상징했던 친박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군부 시대를 긍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역사는, 자신의 철학을 권력자에게 위탁했던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버크는 과연 어떤 진단을 내릴까요. 보수주의의 원류 버크는 자신의 사상을 권력자에게 의탁했던 친박의 시대를 못 견뎌했을 겁니다. 버크가 대한민국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었다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 나오는 이 구절로 연재를 갈음합니다. 이 책은 230년 전에 쓰였습니다.

취약한 권위와 권위의 부침 속에서 어느 민중적 장군이 출현하여 모든 사람들의 복종을 받는다면 그가 곧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민중들은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왕이 아니고 우리가 선출한 신분제의회도 아니며 우리가 당신들을 선출한 원리에 입각하여 회의를 진행하지도 않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이런 상황에서 군대와 민중이 결탁하면 어찌 되겠는가?
-에드문드 버크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 (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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