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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76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참뜻은?…'미스 함무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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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시대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을 것 같아요. 평민이나 노예가 귀족이나 힘 있는 사람의 털끝 하나만 실수로 건드려도 목이 날아갈 수 있던 때 아닐까요…. 법이란 결국 자연 상태의 본능을 절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지 그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건 아닐 거예요.”
 
법정에 가 보신 일 있으신가요? 저는 취재 때문에 가보기는 했습니다만, 당사자가 되어 그 자리에 선다면 여러 모로 다르겠지요. 법정 가장 높은 곳에 앉아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 선고하는 판사는 매번 법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법정 드라마를 여러 편 보기도 했지만 판사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검사나 변호사가 주로 중심이었고.. 거악을 때려잡거나 억울한 약자를 변호해내거나 그런 식이죠.
 
독서가에 글 잘 쓰는 판사로 알려진 문유석 판사가,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면 연상되는 함무라비, 기원전 1700년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함무라비 대왕이 만들었다는 인류 최초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 196조에 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따온 ‘미스 함무라비’가 책의 제목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첫 배치된 박차오름 판사입니다. 첫 출근길에 지하철 성추행범을 잡아 경찰에 넘기는 대활약을 펼치면서 SNS 상 스타가 되면서 ‘미스 함무라비’라는 별명을 얻게 됐지요. 3년차 판사인 임바른 판사와 20년 경력의 부장인 한세상 판사 이렇게 3명이 함께 합의부를 구성합니다. 당찬 신입 판사와 온건하면서도 좀 시니컬한 3년차 판사, 그리고 신중한 현실주의자인 고참 판사.. 이런 조합으로 각종 사건의 재판을 치러내는 식인데요, 직장 내 성추행 문제를 다룬 3부를 읽겠습니다.
 
“그렇게 공부 많이 한 분들이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하더라고요…최소한 상대를 유혹할 가능성이 있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상대에게 오히려 혐오감만 일으키는 방법으로 그 본능을 표출하니 놀라울 뿐이죠.”
 
“그냥 껄떡대고 싶은 발정난 수캐들이 만만한 대상을 찾는 거예요. 자기 나와바리에서 자기 알량한 권력으로. 본능을 내세우며 남한테 피해 끼치는 놈들은 그냥 수캐로 취급하면 되는 거예요. 개가 아무데나 달라붙어 허리 흔들며 흉한 짓 하려들면 몽둥이로 때려서 버릇을 고쳐야죠. 그거 하라고 판사님들이 있는 거 아녜요?”

 
저는, 카페 여사장의 “개는 몽둥이로 때려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에서 ‘타구봉법’을 떠올렸습니다만… 아무튼 기시감이 짙습니다. 가상의 인물에 상황을 가정하긴 했으나 비슷한 사례를 뉴스에서 혹은 일상에서 많이 접했기 때문이겠죠.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니, 저는 이 말이 잘 믿기지 않습니다. 살면서 그런 이들을 잘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이 굉장히 주관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에 절대적일 수 있는 판결을 해야 하는 판사들은 어떨까요. 주폭 문제를 다룬 부분을 읽겠습니다.
 
“또 그놈의 사회적 약자 타령? 자기가 힘들면 남에게 합법적으로 피해 끼칠 권리라도 부여되는 건가요?...우리 사회는 술 먹은 사람들의 응석에 너무나도 관대해요…알량하지만 남자라는 권력, 나이 먹었다는 권력을 면허증 삼아 술을 핑계로 세 살 먹은 애처럼 떼쓰고 행패 부리는 거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 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이 소설엔, 쉬어가는 페이지 격이라고 할지, 중간중간 법원과 판사에 대해 이런저런 실제 에피소드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양념처럼 적어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골무’와 ‘보따리’가 참 흥미로웠는데 그 중’골무’의 한 대목입니다.
 
“독자들은 판사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무엇을 떠올리실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판사들에게 묻는다면 상당수 판사들은 이것을 반사적으로 떠올릴 것이다. 바로 고무로 만든 골무다. 엄지손가락에 끼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판사들이 일생 매달리는 업業, ‘기록’을 넘기는 도구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언론에 나오는 거창한 사건들, 튀는 일들 뿐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대다수의 일하는 이들은 화려하지 않고 튀지도 않는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호들갑스러운 탄식과 성급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묵묵히 굴러간다.”

 
이 소설은 사실 저자가 마지막에 고백하듯이, 원래 소설로 구상된 게 아니었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법정 이야기 기고를 부탁받았는데 실제의 사건을 쓰다가는 명예훼손 소지도 있어서 거절했더니 그럼 소설로 쓰면 어떠냐 해서 엉겁결에 시작했다는 설명입니다. 박차오름, 임바른, 한세상 같은 등장인물 이름도 그렇고, 각 부와 부 사이에 들어가 있는 에피소드도 재미있긴 하지만 몰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 있는 작가의 말을 잠시 읽겠습니다.
 
“판사는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일 뿐이다.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기능한다. 그 법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결국 시민들이 쥐고 있다. 권리 위에 잠자지 말자.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렇다고 합니다. 작가의 전작인 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과 ‘판사유감’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던 저는 이 소설…이라기엔 조금 특이한, 이 소설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엔 변호사와 기자, 이번엔 판사가 저자였는데 다음엔 누굴까요? 기대해주세요.
 
(문학동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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