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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블랙리스트 ② : 대통령에게 전하는 老 시인의 ‘일갈’

[취재파일] 블랙리스트 ② : 대통령에게 전하는 老 시인의 ‘일갈’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취재하며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입니다. SBS 특별취재팀이 블랙리스트를 입수해 그 안에 적힌 이름을 살펴보던 중 특히나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고은'.

'설마' 했습니다. '설마, 그 고은 시인이겠어.' 그래서 넘어갔습니다. 리스트에 함께 적힌 다른 문화예술인들과는 달리 '시인'이라는 설명이나 대표 작품도 쓰여있지 않아 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리스트를 입수한 첫날의 일입니다. 다음날, 다시 리스트를 살피던 중 다시 '고은' 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름 옆 '지원 내용'에 '이탈리아 카포스카리 대학교'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동명이인의 고은은 누굴까'라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고은', '카포스카리 대학교'를 함께 검색해봤습니다. 이탈리아 카포스카리 대학교가 2013년 4월 고은 시인을 명예교수로 임명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나왔습니다. '설마'가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세계 문학계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자, 대한민국의 역사를 함께해온 한국 시의 거장인 그가 왜 블랙리스트에 올랐을까. 시인 본인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물어봐야 했습니다.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老시인의 일갈 "블랙리스트? 천박한 야만"

출판업계를 통해 시인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전달받았지만 통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 실패한 뒤, 기적처럼 전화기 너머로 고은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은 시인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은 지난달 27일 SBS 8시 뉴스를 통해 보도가 됐습니다. 미처 방송 리포트에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시인의 '일갈'을 취재파일을 통해 모두 공개합니다. 시인은 특유의 여유를 잊지 않으면서도 단호했고, 분명했습니다.

기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선생님 이름이 포함되셨는데 들어보셨어요?
고은: 아 그래요? 영광이네요.

기자: 포함된 이유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고은: 아니요. 난 대선 후보 지지한 적 없습니다. 난 언제나, 시인으로서 원칙이 있습니다. 대선 후보 따위나 지지하고 반대하고 하는 그런 시인은 되기 싫어서 난 그걸 안 합니다. 시인의 위엄을 위해서 난 안 합니다.

기자: 혹시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적은 있으세요?
고은: 명단이야 뭐, 세월호 (인양)해야 하고, 정부 비판하고 그런 거야 했겠죠.

기자: 그런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포함시킨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고은: 그러니까 우리 정부가 얼마나 참 구역질 나는 정부인지 알 수 있죠.

기자: 2013년에 카포스카리 대학교 가실 때 정부 지원 프로그램(해외레지던스프로그램) 지원한 적 있으세요?
고은: 나는 거기서 명예펠로우를 받았어요. 그게 미안해서 내가 그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교수로 특강을 해줬어요.

기자: 서류엔 정부가 2013년에 지원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고은: 네. 숙박비 등 일부 지원을 해줬습니다. 

기자: 2014년과 2015년에는 지원이 없는데, 그 이후에 정부 지원을 요청하신 적은 없으세요?
고은: 난 정부에 뭐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기자: 정부가 예술인들을 사상 검증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은: 그건 정말 아주 천박한 야만이죠. 자기 정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하나도 없는, 그런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참 바보예요. 여(與)가 있으면 야(野)가 있고,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 이런 구성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나온 것 같아요.

민족시인 고은도 '블랙리스트' 포함
● "이명박 정권보다 박근혜 정권이 더 졸렬해"

비단 블랙리스트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벌어진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서도 고은 시인은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기자: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적 있으세요?
고은: 내가 그 사람을 뭐하러 만납니까?

기자: 문학 원로들 만나는 자리 같은 곳에서 만나신 적은 없으세요?
고은: 그전에 이명박 정부 때는 나를 자꾸 원로 회의에 나오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늘 사절했죠.

기자: 이번 정권에는 그런 요청은 없었나요?
고은: 난 그런데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박 대통령도) 알겠죠 피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겠죠.

기자: 역대 정권과 비교해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 인식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고은: 이명박이나 여기(박근혜 대통령)나 대동소이하죠. 하지만 지금이 더 졸렬하죠. 먼저는 4대강 사업으로 국가 재정 망치고, 국가 자연 다 망치고 강산까지 망치지 않았습니까. 산천을 다 썩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나라 전체의 구조를 흔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우리 경제가 이렇게 된 것도 누구 탓인가요. 저 사람(박 대통령)이 다 망쳐놓은 것 아닙니까.


● 대한민국 정치에 고하다…"국민이 돼보라"

10여 분 간의 짧은 통화였지만, 시인의 입에선 오랜 시간 성찰이 필요할 무게감 있는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시인에게 대한민국이 왜 이런 혼돈의 순간을 마주하게 됐는지를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고은: 한 번도 국민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요. 그 때문이에요. (권력자는) 국민이 되어 봐야 해요. 시민이 되어 봐야 해요. 이 정신 속, 의식 속에 '내가 국민이다'는 의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의 권력자들은) 이런 기초체의 의식이 없어요. 그런 엉터리들이 국정을 맡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생깁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간 대다수 국민들도 바보예요.

거침없었지만, 시인의 마지막은 '희망'으로 끝났습니다. 희망의 단서는 '촛불', 그리고 '국민'이었습니다.

고은: 이번에 이쪽이나 저쪽이나 함께 다 타파하는 그런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시민혁명이 될 겁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블랙리스트 파문은 비단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명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쩌면 반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불통(不通)'의 연장 선상일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불통'도 문제겠지만, 특히 권력자의 '불통'은 그가 쥔 권력의 힘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가질 겁니다. '반대'를 품어야 비로소 '합'이 이뤄진다는 고은 시인의 일갈을 권력을 쥔 분들이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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