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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블랙리스트 ① :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잔인한 이유

[취재파일] 블랙리스트 ① :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잔인한 이유
풍문으로 듣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SBS특별취재팀이 리스트의 실체를 처음 확인한 것은 지난 달(12월) 26일이었습니다. 그 리스트에는 91개의 개인 또는 단체 이름과 왜 리스트에 포함됐는지 이유도 자세히 써있었습니다.

‘1만 명이 넘는다’, ‘송강호랑 김혜수도 있다더라’ 등 박근혜 정권 내내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소문은 많았습니다. 실제로 1만 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 이름이 적힌 내용이 언론 보도로 공개되기도 했지만 실체는 묘연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빌미로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실제 불이익과 핍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예술인들의 증언이 있었는데도 무시했습니다.

SBS는 90여명의 개인 또는 단체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확보하고, 이후 2014년부터 2016년2월까지 정부가 관리한 블랙리스트를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실제로 문서에 ‘적시된’ 이름만 수백 명이고, 문체부가 ‘대외비 문건’을 통해 스스로 밝힌 ‘관리 대상’은 1만 건에 달합니다.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관리해온 기록을 살펴보면, 관리 자체도 참 녹록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과거 활동 경력 등을 다 살펴보는 것은 물론, 하물며 연극을 하는 극단이 어떤 작품을 공연해왔는지도 면밀히 파악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문체부는 물론 청와대와 국정원까지 개입했습니다.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 돈과 권력으로 예술의 자유를 짓밟은 ‘문화 정부’

문체부 블랙리스트와 관리지침이 담긴 대외비 문건을 보면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개인과 단체를 어떻게 압박했는지 명확히 나타납니다.

무기는 ‘돈’이었습니다. 행동대원 노릇은 문체부 산하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했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정부 예산 및 기금으로 문학, 연극, 무용 등 각 예술분야의 창작 활동을 지원합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공연예술창작산실육성지원 등의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각 사업의 취지에 맞게 개인이나 단체가 공모를 하면 심사를 거쳐 자금 지원을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까지 지원을 합니다.

정부의 이런 지원은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나 단체에겐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계의 이런 ‘약점’을 노렸습니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개인이나 단체는 자금 지원 대상에서 배제시킨 것입니다.

야당 대권주자를 지지해 배제된 개인이나 단체는 오히려 이유가 명백하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관리 기준은 ‘치졸’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국가보안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4.3사건을 다뤘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좌평향 단체에 대한 후원을 확대했다’는 이유로 지역 문화 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마저 끊었습니다.

‘낙인찍기’의 정황도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연출가 박근형 씨는 정부의 블랙리스트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 시작은 박 씨의 작품 ‘개구리’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고 비판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후 박근형 씨의 차기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대한 예산 지원도 끊으려 했고, 박 씨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 극단에 대한 불이익도 이어집니다. 무조건 ‘박근형’이라는 이름이 연관된 작품이나 극단은 배제 대상이 되는 겁니다.

문화예술위원회 직원도 이 같은 정부 ‘윗선의 지시’를 인정했습니다. SBS가 입수한 지난 해 6월 문화예술위원회 직원과 연극 분야 민간 심사위원들이 참여한 ‘공연예술창작산실육성지원’사업 관련 비공식 회의 녹음에는 이런 대화가 등장합니다.

예술위 직원: 이런 일이 벌어진 토대가 있죠.
심사위원: 개구리 이야기 하시는 건가?
예술위 직원: 박근형 선생님의 작품은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 대통령의 아버지를 직접 거론을 한 문제 때문에 특수하게 된 것이고요.


박근형 씨의 작품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시키지 않으면 다른 연극 작품들에 대한 지원도 철수할 수 있다는 ‘협박’도 나옵니다

심사위원: 지금 이대로 가면 다른 작품들도 전혀 지원을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일곱 편 모두가 지원을 못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예술위 직원: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심사위원: 전체가 지원신청에서 다 탈락할 수도 있다는 거죠? 사업 자체가 진행이 안 되게?
예술위 직원: 저는 이런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까지 갈 정도로 박근형 작품을 지원해야 하는가, 그런 원론적인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그 정도까지 꼭 지원해야 할 작품인가 (싶은 거죠.)


대형 극단이나 인지도가 높은 작가, 연출가들은 ‘정부 예산 안 받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문화예술인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단 점을 생각하면 정부의 이런 태도는 잔인합니다. 돈이 아쉬우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쓰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융성’, ‘케이컬처(K-culture)’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내세우며 문화정부를 자임해 왔습니다. 하지만 뒤로는 예술을 돈과 권력의 발아래 놓으려 했습니다. ‘문화정부’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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