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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의 라이프 저널리즘] 나, 다니엘 블레이크…불행한 가정도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이주형의 라이프 저널리즘] 나, 다니엘 블레이크…불행한 가정도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고전 ‘안나 카레리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 19세기의 명문장은 21세기에는 이렇게 수정할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한데, 불행한 가정도 다들 똑같은 이유로 불행하다.”

영국의 거장 켄 로치(80)에게 10년 만에 두 번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2016)을 안긴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현대 가정의 불행이 얼마나 ‘세계화’됐는지 보여준다.


영국 뉴캐슬의 가정이나 한국의 가정이나 빈곤층의 불행이 초래되는 방식은 어찌나 비슷한지, 이 영화를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사적 공간이 어디인지 깨닫게 된다. 그곳은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는 아닐지라도, 역사상 불평등이 가장 많은 미용 시술로 포장된 야만의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목수로 살아온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당분간 일을 할 수 없게 돼 정부에 복지 급여를 신청한다. 하지만 인터넷과 ARS, 관료 ‘시스템’으로 무장한 정부에게 그는 ‘시스템 부적응자’일 뿐이다. (다니엘은 혼자서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정부 상담가가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으면 비난을 퍼붓고, 다른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자기 일처럼 항의한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온 일종의 ‘차상위계층’ 다니엘은 끝내 아무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이 시놉시스만 보면 매우 암울한 영화 같지만-실제로도 암울하긴 하다- 다니엘이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영웅적(이라 불러 마땅한) 행보는 이 겨울의 언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다.

자신도 어려운 형편인 다니엘이 꾸준히 돕던 홀어머니 가정의 아이는 생활비가 없어 가구마저 팔아버린 다니엘의 휑한 집에 찾아와서 간절하게 문을 두드린다. “아저씨가 저희를 도와주셔서 저도 아저씨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다니엘 집의 문을 두드리는 아이
21세기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산업’ 국가인 영국 빈곤층의 비참한 현실은 -돈이 없어 생리대마저 훔쳐야 하고, 무료급식소에서 굶주림에 못 이겨 허겁지겁 통조림을 입에 털어 넣다 울음을 터트리고, 신발 밑창이 떨어져 딸이 놀림을 받아도 신발 사줄 돈이 없어 몸을 팔아야 하고…- 19세기에 출판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이란 책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리고 시대퇴행적이란 측면에서 전혀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이 영화는 노동계급의 비참한 현실 못지 않게 아직 전근대와 근대, 현대가 섞여 있는 이 시대에 글로벌화된 자본이 ‘현대적인 시스템’으로 얼마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자본이 구축해놓은 진입 장벽-이른바 ‘시스템’-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기계에서 소외시키고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존재로 만든다.

돈이 되면 신호 한 두 번 만에 받지만, 돈이 안 되는 일이면 2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ARS ‘시스템’, 비용을 줄이는 계약 해지는 순식간에 뚝딱 처리해주지만, 비용이 나가는 일이면 대면 접촉을 없애고 인터넷 등으로 가능한 절차를 복잡하게 하고, 어렵게 만들어 포기시키는 복지 ‘시스템’과 기업들의 컴플레인 해결 ‘시스템’은 이 영화의 배경인 영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구축하면서도 청년들에게는 희망을 찾기 힘든 푼돈 줘가며 최저임금 몇 푼 올리는데 벌벌 떠는 대기업들이 최순실에게는 몇 백억씩 퍼주었으니 이를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비즈니스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다니엘은 생계를 위해 가구를 팔아야 할 정도의 상황에서도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며 홀어머니 가정을 돌본다.

통조림을 허겁지겁 따먹다 울음을 터뜨리는 싱글맘 케이티

이 영화에서 ‘차이나’란 상징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흑인 청년은 창고에서 물건 나르는 일을 하다가 저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 중국 광저우에 있는 신발 공장에 다니는 중국 청년으로부터 150파운드짜리 유명 브랜드 신발을 빼다가 80파운드에 거리에서 판다. 시중가의 거의 반값에 싸게 팔아도 창고 알바보다 벌이가 훨씬 좋으니, 도대체 70파운드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업의 이윤은 정당한 것인지 영화는 되묻게 한다. 아마도 그런 이윤들은 최순실 ‘등’에게 갔으리라.

차이나와 싱글맘에게 사람답게 살 것을 호소하는 다니엘. 그런 다니엘이 ‘시스템’에 저항할라치면 여지없이 경찰과 공무원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그들은 바로 ‘시스템’의 최하부 집행자로 시스템의 일부이다- 다니엘이 굶어 죽게 생겼다고 복지 기관 담벽에 항의 낙서를 하다 잡혀가는 것을 본 행인이 “그 사람은 풀어주고 장관이나 체포하라”고 하자 경찰은 “네 일이 아니니까 네 갈 길이나 가라”고 위협한다.

복지 급여를 위한 면담 시간에 몇 분 늦었다고 쫓겨나게 생긴 싱글맘 가족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주변의 양해를 얻어 차례를 양보해준 다니엘에게 ‘복지 담당’ 공무원은 오히려 “네 일 아니니 참견하지 말라”고 말한다. 시스템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아니라 시스템에의 복종이다.

다니엘은 복지 급여를 받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항고하다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다니엘이 항고 법정에서 읽으려고 써서 가져왔던 편지는 장례식장에서 싱글맘의 입을 통해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나는 의뢰인(클라이언트)도 아니고, 고객(커스터머)도 아니고, 서비스 이용자(유저)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고, 보험 번호도, 화면 속의 신호도 아닙니다.

나는 (사회적) 책임을 다했고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습니다. 나는 굽실거리지 않았고 이웃을 동등하게 대했습니다. 제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사람이지 개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를 존중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개봉 12일 만인 지난 19일, 켄 로치 감독 영화로는 사상 최다 관객인 3만-30만이 아니다-을 돌파했다. 가뜩이나 쓸쓸한 이 계절에 보기 불편한 영화지만, 인간의 존엄이 결코 돈이나 육신 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이 계절에 놓치기 아까운 영화다.

(P.S 이 영화는 극장 측에 큰돈이 되지 않으므로 먼 거리의 극장을 찾아가야 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처럼 포기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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