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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취재파일] SPC, 달걀 사재기 조직적 지시…내부 문서 입수

'달걀 한 판'이 귀한 시절입니다. 팍팍한 서민 경제, 시름거리 하나 더 늘었습니다. 국내 대형마트들은 AI 여파로 달걀 공급이 줄어들자 1인당 사들일 수 있는 달걀 수량을 30구 한 판으로 제한했습니다. 값도 올랐습니다. 알을 낳을 수 있는 닭들 개체수가 부쩍 줄면서 최악의 경우 달걀 수급이 1년까지도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달걀 요리 직접 해먹는 개별 소비자의 불편도 불편이지만, 달걀로 만든 요리를 판매하는 업자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공급업자에게 웃돈을 주고도 달걀 자체가 부족해 가게 문을 닫게 생겼습니다. 빵, 과자, 오므라이스… 달걀 꼭 필요한 품목들 꽤 많습니다. 빵집 주인, 과자집 주인 할 것 없이 꼭 ‘달걀 수급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소규모 영세 상인들의 타격은 특히 더 큽니다. 지난주 중구 약수시장에 있는 작은 빵집을 찾았습니다. 전통시장 활성화 대책 지원에 힘입어 주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들과 힘겹게 경쟁하고 있는 사장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착한 빵’ 대접하겠다고 5년 넘게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 제품의 절반도 안 되는 값에 빵을 팔고 있는데, 하루에 못해도 7판은 들어가는 달걀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주름이 늘어갑니다. 공급량이 많이 줄어들면 공급업자는 자연스레 좀 더 적은 규모로 거래하는 거래처부터 잘라내기 마련입니다.

‘파리바게트’로 대표되는 SPC 그룹이 대표적인 이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을 보유한 국내 굴지의 유통기업입니다. 파리바게트 말고도 이름난 브랜드만 10개가 훌쩍 넘습니다. 물론 대형 유통업체라고 ‘달걀 대란’을 피해갈 순 없습니다. 구매부서 직원들은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출근해 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족한 달걀 공급 분을 두고 다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입니다.

● ‘의좋은 SPC’…애사심에 달걀 사들인 직원들?

이 와중에 SPC 직원들이 마트에서 달걀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 매체는 21일 SPC 직원들이 양재동 사옥에 있는 지하 주차장에서 각자 사들고 온 달걀을 무더기로 모아 성남의 한 공장에 수급하는 현장을 촬영한 뒤 보도했습니다. 이른바 ‘사재기’라는 겁니다.

SPC에 따르면 하루에 제품 생산을 위해 필요한 달걀은 80톤, 30구 1판 기준으로는 8만 판 정도라고 합니다. 아무리 피가 터지는 전장이라도 ‘도의’가 따르는 법인데, 서민들이 구입하는 마트, 슈퍼 달걀까지 넘보는 건 아무래도 ‘무도’한 일입니다. 골목상권 침해에 준하는 ‘서민상권 침범’이랄까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에게 돌아온 대답은 생뚱맞게도 “애사심”이었습니다. 달걀 수급을 걱정하는 직원들이 회식비를 아껴 주변 마트와 슈퍼 등지에서 법인카드로 달걀을 사들였다는 겁니다. SPC 측은 사들인 수량은 200~300판 밖에 되지 않는다며 보도 이후 사내 여론이 좋지 않아 그만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달걀 대란에 대형마트들은 ‘1인 1판’ 판매 제한을 두고 있는데, SPC 측에서 밝힌 200~300판이라도 가늠하면 200명에서 300명 가까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달걀을 사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은 달걀은 절대 생산라인, 그러니까 빵이나 과자류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지 않고 따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등에 쓰이는 연구와 교육용으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직원들의 애사심을 ‘사재기’로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며 대형 유통기업인 만큼 마트에서 소매가로 구매한 달걀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설명도 곁들였습니다.

● SPC는 회사밖에 모르는 ‘바보’?

하지만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미 지난주 금요일 SPC는 전국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달걀을 사들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취재결과 확인됐습니다. SBS가 입수한 대외비 문서에는 ‘포장된 30구들이 달걀 한 판을 우선 사되 없을 때는 15구들이를 살 것’, ‘달걀에 유통기한이 기록돼 있어야 한다’와 같은 구체적 지침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식용란 구매 지침
지하 3층에 각 직원이 공수한 달걀을 가져오면, 영수증을 제출하고 확인증을 수령하라는 ‘동선’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른바 ‘전사 계란 수급 캠페인’입니다.

더구나 ‘사재기’ 첫 보도 이후에는 ‘함구령’까지 내려졌습니다. 이른바 ‘캠페인’ 관련 파일을 모두 삭제하고, 질문사항은 구두로만 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겁니다. SBS 취재진이 사실 확인을 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사재기’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룹 대외관리팀은 SBS 취재진이 취재를 시작한 무렵, “팀에서 갹출해 지역 마트를 통해 달걀을 구입하고, 근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2~3명이 한 조를 구성해 활동하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전사 계란 수급 캠페인
공수한 달걀들을 ‘연구 분야’에 쓰고 있다는 말도 거짓이었습니다. 취재 결과 이 달걀들은 경기도 성남과 충주 등의 공장에서 직접 제품을 만드는 데 투입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쉽게 말해 서민들이 마트에서 달걀 프라이 해 먹을 제품들을 사들여 빵을 만들 작정이었단 겁니다. 강호의 도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21일 오후 기준으로 30구 달걀 천 판 정도가 개별 직원들의 ‘사재기’로 채워졌고 이 수급 상황은 별도의 상황실에서 실시간으로 동향을 살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SPC 직원들이 여전히 동네 마트로, 슈퍼로 찾아가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던 시간, SPC 측은 취재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힘들구나, 애사심에서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바보 같은 일이긴 했습니다. 우리 SPC, 바보 같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 ‘자발적 기금 모금’ vs ‘자발적 달걀 수집’

‘자발적’. 다른 어떤 것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 말미암아 이른 생각이나, 행동을 말할 때 쓰는 수식어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애사심’도 좋은 말이죠. 개인주의가 득세하는 시대에 조직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하지만 요즘 이 좋은 단어들이 오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하면, 많이들 들어보셨을 ‘자발적 기금 모금’이라는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문화 융성과 스포츠 발전을 위한 기업들의 자발적 기금 모금. 조직의 위기 타개를 위한 직원들의 애사심과 여기에서 비롯한 자발적 달걀 수집. 좋은 단어들의 본뜻을 망치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달걀 사려고 회사에 들어왔나 자괴감 느꼈음직한 직원,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대형 유통기업이 새로 찾느라 골몰하고 있다는 ‘공급처’는 결국 영세 상인들이 놓치게 되는 공급처입니다. 달걀을 찾자니 없고, 그렇다고 소매가로 마트에서 달걀을 사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영세 상인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대형 유통기업은 두 가지 일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수집과 홍보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SPC 그룹은 ‘유통가의 삼성’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괜한 기시감, 기분 탓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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