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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 반세기의 철옹성 권좌…'불사조 김기춘'

미르-K스포츠 재단의 기금 불법 모금, 정부 부처-사기업-의료문화계 인사전횡, 광고회사 강탈 의혹 등 사회 전방위적으로 국정농단이 벌어졌다. 국가의 사유화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한 배경엔 권력의 오남용을 막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 그 중심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있다.

두 사람은 "최순실 씨를 모른다"고 주장하며 일관되게 최 씨와 선을 긋고 있다. "국정농단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특별검사 법안 수사대상 목록엔 우 전 수석의 이름이 명시돼 있다. 또 김 전 실장에 대한 특검 수사도 불가피해 보인다.

● '불사조 기춘대원군'

'불사조 김기춘' 법조계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실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 전 실장과 국정농단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 전 실장과 근무한 인연이 있는 전직 검찰 고위 관계자는 그를 두고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의 진리가 통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관직을 벗고 나가도 몇 년 만에 다시 기관장으로 복귀할 수 있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있지만, 김 전 실장은 항상 타오르는 불이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김 전 실장이 하면 가능했고, 누가 봐도 무리한 일이였지만, 그가 하면 뒷말이 없었다"며 김 전 실장의 처세술에 대한 평가도 내놨다.

1960년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시절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 전 실장은 3년 뒤인 1963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정됐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듬해 검사로 임관했고, 1971년 법무부 검사로 헌법 초안 작성에 관여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유신헌법'이다.

이후 김 전 실장은 승승장구했다. 기수 서열이 공고한 검찰 조직 내에서 3기수 이상을 제치고 승진하기도 했고, 당대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장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유신시절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인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뒤늦게 조작된 사실이 드러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이후 권력을 틀어 쥔 전두환 씨가 김 전 실장을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에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권력의 중심에 재진입했다.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직후인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선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이란 여론조작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초원복집 사건'에서 김 전 실장은 주도적 역할을 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됐다. 하지만, 처벌은 피했다. 자신에게 적용된 법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마부작침]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영삼 정권 시절 국회의원에 당선돼 내리 3선(15대~17대 총선)을 연임했고, 16대 국회 말기인 2004년 3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소추위원을 맡아 탄핵소추를 주도했다.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법률지원단장을 맡았고, 5년 뒤 대선에서 정치원로 모임인 7인회 멤버로 활약하며 박 대통령의 당선에 힘을 실었다. 이번 정권의 막후 권력자로 남는가 싶더니 이듬해 8월 75세의 나이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돼 정치 전면에 나섰다. 정치권에선 그를 두고 '기춘대원군', '부통령'이라고 불렀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실세 비서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검찰, 국정원을 포함해 부처 인사와 공기업 인사에까지 김 전 실장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며 "장관들이 부처 내 인사를 하려고 해도 김 전 실장의 허락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번 정권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2015년 4월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김기춘 미화 10만 달러'라고 적힌 메모를 작성했다. 김 전 실장에게 금품을 줬다며 성 전 회장이 메모를 남긴 것이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당연한 수순으로 예상됐지만, 김 전 실장은 조사 한번 받지 않고 증거부족을 이유로 불기소됐다. 공소시효와 증거부족이라는 이유로 위기를 벗어난 것이었다.

김 전 실장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의 강한 권력욕을 엿볼 수 있다. 독재를 위한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김 전 실장은 민주화 이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대체로 유지했다. 그에게 권력을 줬던 대통령들은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그의 권력은 지속된 셈이다. 이를 두고 상당수 정치권 인사들은 "김기춘의 '타고난 관운'"이라고 촌평했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이 법무장관 시절 함께 근무했던 한 후배 검사는 "관운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 전 실장은 91년 3당 야합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노태우 정권 타도 시위를 벌일 때 검찰총장에서 법무장관으로 취임했다"며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이 위기가 극복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김 전 실장은 매끄럽게 해결했다"고 말했다.

당시 공안당국은 시위의 배후세력을 규명하겠다며 합동수사본부를 꾸렸고, 이 과정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벌어졌다. 검찰은 공안몰이를 통해 시위세력을 '동료를 자살시킨 패륜 집단'으로 낙인찍어 여론을 반전시켰다. 강 씨는 24년이 지난 2014년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됐지만, 김 전 실장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김 전 실장의 인생을 통틀어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과 초원복집(선거법 위반 혐의), 성완종 리스트로 총 세 번의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김 전 실장에겐 위기는 항상 기회였고, 그 어떤 위기도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사건 당시엔 논란이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흐지부지 끝났다.  

그런 그에게 '국정농단'이라는 4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김 전 실장은 "최순실을 모른다"며 부인하고 있고, 검찰 역시 김 전 실장을 소환 조사하지도 않으면서 사건이 끝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치권은 김기춘 전 실장을 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해 청문회장에 출석시켰고, 특검은 김기춘 전 실장을 수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장동호
디자인/개발: 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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