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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고졸 출신 첫 대기업 부회장의 메시지는?

[취재파일]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고졸 출신 첫 대기업 부회장의 메시지는?
“학력이 아니라 최고의 생각과 열정이 중요”…40년 한우물이 완성한 ‘1등 신화’

정유라 씨가 과거 SNS에 올린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란 글은 대한민국 10대와 청년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반칙을 일삼고도 반성은 커녕 당당하고 뻔뻔한 그녀의 태도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에 따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일 겁니다.
 
대기업 인사철입니다. 인사 방이 붙을 때마다 희비가 엇갈립니다. 발탁에 환호하고 수평 이동에 그나마 안도하고, 좌천에 좌절하고, 신상필벌이란 원칙 속에 희비가 엇갈리는 인생의 '축소판'이랄까요. 그 과정에서 오랜 집념과 노력을 인정받는 분들의 이름을 확인하면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다는 안도감 비슷한 것도 느낍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LG그룹 인사를 보고 든 생각입니다. 조성진 LG전자 생활가전 사업본부 사장이 최고경영자(CEO) 부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958년 LG전자 설립 이후 최초의 고졸 출신 부회장입니다. 10대 그룹에서도 아마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우물을 판 40년 월급쟁이가 LG전자 총 사령탑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올 초 열렸던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 CES에서는 삼성과 LG 등 우리나라 기업들의 전시관이 관람객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LG전자는 당시 프리미엄 라인 'LG 시그니처' 전시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트윈워시'라는 세탁기가 단연 주목받았습니다. 세계 최초로 드럼세탁기 하단에 통돌이 세탁기를 결합한 혁신제품으로 디자인이나 소비자 편리성 측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CES '혁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등 경쟁사들의 발 빠른 추격에 LG는 프리미엄 라인 강화로 대응해나가겠단 전략이었습니다. 제가 “중국 기술력이 상당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금방 모방하지 않겠냐” 물었더니 LG전자 관계자는 "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선 조성진 사장이 기울인 노력이 상당하다. 사실 조 사장이 보유한 세탁기 모터 관련 특허 없이는 이 제품 설계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조 사장은 다년간 세탁기 쪽에 몸담으면서 내부 설계에 관련된 수십 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그 특허를 침해하지 않고 같은 면적의 외관 안에 같은 기능을 담은 제품 설계를 해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조사장은 이 제품을 자식처럼 아낀다고 표현했는데, 8년간 150명 이상의 개발 인력, 200억 원가량의 비용이 투입된 LG 세탁기 역사상 개발 기간·인력·투자에서 최대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DD(Direct Drive)' 모터란 기술을 시작으로 조 부회장은 36년 동안 세탁기를 연구하면서 꾸준히 기술 혁신을 이뤄냈습니다. 과거 일본 기술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에서 일본을 뛰어넘고, 결국 미국 시장 1위에 오르는 성과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성진 부회장에 대한 조직의 신뢰와 지지가 얼마나 강한지 느낀 계기가 있었습니다.

조 부회장은 2014년 '세탁기 파손 시비’에 휘말리며 곤욕을 치렀습니다. 2014년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에서 조 사장 일행이 삼성전자 세탁기를 고의로 부쉈다며 삼성전자가 조 사장을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삼성은 행사장 현지 아르바이트생들까지 독일에서 증인으로 불러들일 만큼 조 사장 혐의에 대해 확신했고, LG전자 측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습니다. 검찰은 그 해 말 LG전자 여의도 사옥과 창원 지사까지 압수수색하며 조 사장을 압박했습니다. 삼성과 LG의 고소와 맞고소가 이어지다 결국 양사는 법적 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지만 검찰은 공소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세탁기 파손 전쟁은 2년이 넘는 재판 끝에 지난달 대법원이 조성진 부회장의 무죄 판결을 내리며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한창이던 2015년 말 조 사장은 LG전자 대표이사에 올랐습니다. 보통 조직에서 외부 소송으로 법정 다툼을 벌인다는 것은 인사상 플러스 요인이 되기 어려운데도 조직은 조 사장에 변함없는 신임을 보낸 것이기 때문에 업계에서도 화제가 됐었습니다. 당시 함께 고발당해 법정을 오갔던 홍보실의 한 임원이 2심 무죄 판결 후 이런 언급을 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무죄 판결 받고 조 사장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봤다. 조 사장은 정말 억울해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끝까지 재판에 충실히 임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냐. 평생 세탁기 잘 만들어보겠다고 그 분야에 올인해왔는데 정작 본인이 경쟁사 세탁기나 파손시킨 사람으로 남는다는 건 너무나 불명예스럽고 도저히 개인으로서도 조직으로서도 용납이 안 된다고 하더라. 그 마음고생을 알기에 함께 가슴 먹먹했다”. 조직원들의 진심어린 신뢰를 받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 ‘세탁기 장인’의 새로운 도전

‘1등 DNA’를 세탁기에서 가전 전체로 전이시킨 성과를 인정받아 부회장에 올랐지만 그의 앞에는 만만찮은 과제가 있습니다. 사실 LG전자의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사업의 잇단 부진으로 모바일커뮤니케이션 사업부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MC 사업본부는 지난 3분기 4천364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6분기째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력 구조조정도 하고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도통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조 부회장에게는 가장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 입니다. 본인의 경력이 가전에 특화돼있다보니 휴대폰 등 무선사업 부문 관련 경험이 없는 것도 약점일 수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조성진 부회장은 과거 위기를 기회로 이끈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현재의 대외적인 불확실성을 감안해 조 부회장이 위기에 빠진 핵심 계열사인 LG전자를 이끌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인사 배경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말단 직원부터 훑고 올라온 엔지니어 출신의 CEO라는 상징성도 조직에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전략, 마케팅 등도 중요하지만 결국 기본이 되는 ‘기술’을 중시하겠다는 의지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또 아직은 돈이 되지 않는 자동차부품(VC) 사업의 수익모델을 구체화해야 하는 과제도 만만찮습니다.  최근 삼성전자가 미국의 세계적인 전장 업체 하만(Harman)을 전격 인수하면서 이 분야를 미래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도 LG전자에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성진 부회장이 프리미엄 가전 사업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스마트폰 사업과 미래 성장사업인 VC 사업을 글로벌 1등 브랜드로 키워낼 수 있을지 시장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는 "세탁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최고의 기술을 개발해낼 수 있는 생각과 열정입니다."라고 말하며 학벌 중시 풍조에 일침을 가합니다. ‘헬조선’에 ‘수저 계급론’, 최근 최순실 사태까지, 좌절 DNA가 판치는 대한민국에 조 부회장의 인생 행보는 적잖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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