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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최순실 게이트'에 무색해진 '김영란법'

김영란 전 대법관 "측근 비리 방치한 리더 책임 묻는 방법 강구해야"

[취재파일] '최순실 게이트'에 무색해진 '김영란법'
'최순실 게이트'에 무색해진 '김영란법'
-서민들은 커피 선물에도 조심…정작 청와대 비선 실세는 기업에 수십 수백억 요청
-김영란 전 대법관 "측근 비리 방치한 리더 책임 묻는 방법 강구해야"

지난 9월 각 언론사들은 앞다퉈 시행이 임박한 '김영란법' 이 가져올 일상의 변화에 대해 취재와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부정 부패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낡은 접대문화를 변화시키고 각자 계산을 하면 간단한 일이라는 법에 대한 긍정적 해석과 잠재적 범법자를 양산하는 인간관계 파괴법이자 경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가 공존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오죽하면 우리나라가 이런 청탁과 접대 관련한 사항을 법으로 지정해 규제해야 할 정도겠냐며 한국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견해를 우세하게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기대와 우려 속에 법은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법 시행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갑니다. 그간 일상생활에 김영란법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나요? 기자로 일하고 있는 제 경우를 말씀 드리면, 아직까진 사실 큰 변화를 감지하진 못합니다. 뭐 대단한 특식을 먹고 다닌 것도 아니고, 대부분 법에서 정한 상한선 아래로 식사를 해도 충분히 취재원과 만나서 얘기하고 교류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도 오해를 막기 위해 기자들에게 각자 계산을 권하기도 하고, 술자리가 1차에서 끝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변 기자들 중에서도 취재원들과 골프를 즐겼던 경우를 제외하곤 일상에 큰 혼선이 생겼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청탁금지법의 영향으로 호텔 레스토랑은 콧대를 낮춰 3만 원짜리 메뉴를 내놓기도 하고, 귀가 시간이 빨라지면서 대형 마트와 편의점 매출이 늘어서 수혜를 봤고, 집에서 술과 안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면서 주류 매출이 증가했고, 소비자들의 필요에 맞춰 더치페이 앱을 개발하는 은행과 카드사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화훼 농가는 축하용 꽃 감소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고, 단기적으로 내수가 위축돼 성장률에도 마이너스 영향을 미쳤습니다. 투명사회 전기를 마련했지만 커피와 카네이션 논란 등에서 보듯 권익위에 5천 건이 넘는 질의가 들어올 정도로 곳곳에서 초기 혼란도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 국민들은 '김영란법'에 적응해가는 사이, 정작 사회 최고위 지도층에서는 황당함을 넘어서는 일들이 연일 드러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은 김영란법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종범 수석과 비선 실세 최순실 씨는 대통령을 앞세워 대기업들에게 거액을 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경련을 통해 대기업들을 상대로 800억 가까운 돈을 일사천리로 모금한 후에도 롯데, SK 등에 추가로 더 돈을 요구하고 포스코에도 지원을 거론하는 등 모금은 집요하게 진행됐습니다. 대통령은 재벌 총수를 두 차례나 독대해 참여를 독려했을 정도로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란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대기업 모금이 김영란법 시행 이전이긴 하지만, 이 법이 지난해 3월 27일 공포돼 1년 6개월 동안의 유예기간을 거쳤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물론 대기업들이 강압에 의해 돈을 강탈당한 피해자일 수 만은 없지만 외압이 상당했던 것만은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최순실 씨는 딸 정유라 씨 학교에 찾아가서 버젓이 촌지를 건네고 딸의 성적, 출석 등등을 놓고 교사들에게 압박을 행사했다는 뉴스를 보면 선생님께 커피 한 잔 건네기 조심스러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기가 찰 노릇입니다.  

김영란법 제정 이후 온 사회는 어떻게 현실성 있게 법을 적용할지 논의가 한창일 때 박 대통령 비선 실세들은 총수 일가의 약점이 있는 기업들을 주 목표 대상으로 강제 출자 작업을 벌인 겁니다. 시행 전이라 김영란법에 따른 법적인 처벌은 면할 수 있겠지만, 국민적인 비판 여론이 들끓어 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대통령이 법안 통과를 당부하는 등 청탁금지라는 법의 긍정적 취지를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분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김영란 전 대법관은 지난 3일 세계변호사협회 ‘아시아태평양 반부패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요즘 보면 어떤 법리를 구상해서라도 측근을 이용한 리더에게 직접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김 전 대법관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법에도 때로는 과격한 발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실감한다"며 "측근의 비리로만 돌리고 그를 활용해 당선된 사람, 이익을 얻도록 방치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김 전 대법관은 2013년 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와 나눈 대담도 소개하며 "측근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그 사람에게 있지 않은가. 형사법상 양벌규정을 응용해서 유사한 법리를 만들어 선출직 공무원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방법을 강구하면 어떨까 얘기했었다"고 부연설명 하기도 했습니다.

투명 사회를 위해 이런 저런 논란 속에서도 소신을 지켰던 김 전 대법관이 느낀 실망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미국 학교에서 이민자 학생들에 대한 폭행이 늘었다는 보도를 봤는데, 혹시나 한국에서도 ‘지도자도 안 지키는 법, 우린 왜 지켜야 하냐?’라며 거꾸로 후퇴하거나 법을 무시하는 행위가 나오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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