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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성기가 지난 뒤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취재파일] 전성기가 지난 뒤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지난 한달 남짓 동안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1941년생), 정경화(1948년생), 알레산드라 페리(Alessandra Ferri, 1963년생), 이렇게 세 명의 거장을 차례로 만나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한공연이나 새 앨범발매 소식 등을 계기로 만나 얘기를 듣다, 언제 한번 그들의 얘기를 함께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발레리나. 분야도 다르고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다른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각자의 분야에서 당대를 풍미한 ‘최고의 예술가들’이란 점입니다. 동시에 본인들에겐 썩 유쾌하지 않은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전성기를 지났다는 평가를 받는 사실도 부인할 순 없겠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누구도 한창때 같을 순 없습니다. 특히나 그들처럼 정신적인 면에서는 물론 육체적인 면에서도 특정 기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도록 요구받는 분야의 예술가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흥미롭게 느낀 공통점은 그들의 육체가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 즉 세월이 꺾을 수 없는 ‘순수한 열정'과 전성기를 지나고서야 비로소 얻게 된 ’진정한 자유‘입니다.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
아시는 것처럼 20세기 후반 3대 테너로 불리던 거장 플라시도 도밍고는 지금 바리톤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젊어서 내던 음역대를 내는 게 힘들어지자 68살의 나이에 바리톤으로 전향해 오페라의 새로운 배역들에 꾸준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열정’이 이런 용기의 동력이라고 말합니다.

“내 에너지는 열정에서 옵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페라에서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며 나는 여전히 그 열정을 느낍니다.…바리톤으로서 부를 수 있는 멋진 노래들이 많았고, 나는 기꺼이 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새로운 배역들을 관객들이 좋아해줬고, 극장도 계속 나를 찾고 있으니 행복할 따름입니다.”

그의 도전은 세간의 평가를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했다면 감히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과거의 명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물론 그가 바리톤이 됐다고 해서 현재 최고의 바리톤으로 불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관객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바리톤 중 한명이 되었고, 팬들의 그런 열광적인 반응은 과거의 명성에만 기댄 것은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열정에 관해서라면 새 앨범을 낸 정경화 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손가락 부상으로 긴 시간 무대를 떠나 있다 돌아온 그녀는 식지 않는 열정에 대해 긴 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집중력과 체력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젊은 연주자도 부담스러워한다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앨범을 내고 3시간에 걸친 무대에 서는 분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지,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노장의 대답은 생각보다 한층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떨어진 힘과 지구력은 컨디션 조절을 통해 만회할 수 있지만, 지난 시간에서 얻은 경험과 자유로움은 과거에는 결코 가질 수 없던 것이었다며, 현재 자신의 연주에 만족감을 표했습니다.

“20대에는 전성기가 40대 중반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랬는데 지금 이만큼 계속해서 하고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바흐도 계속해서 여기서도 더 앞으로 끌고 나갈 그럴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성기가 언제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경험이 쌓이면 인간으로서 또 예술인으로서 성장을 하니까.…그리고 자유로워졌어요. 지금 바흐를 연주하는 게 얼마나 자유로운지 몰라요.”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
알레산드라 페리는 아직 젊습니다. 하지만 발레리나라는 직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두 음악가에 비해 결코 젊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은퇴 후 긴 공백을 깨고 그녀가 50살의 나이에  무대로 돌아온 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시대 경쟁자들은 물론 과거의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은퇴를 결심했던 그녀는 더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춤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자신감이 있다면 육체는 정신이 하라는 것을 하게 되어 있으니, 우리는 그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더는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은 그녀에게 자유를 줬고, 그녀의 춤은 그런 자유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전성기 때 같은 근력이나 탄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평도 있습니다만, 오늘날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가 20년 전 그녀에 연기에 비해 덜 감동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식지 않는 열정과 진정한 자유로움을 자신의 내면에서 새롭게 발견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는 전성기 같지 않은 그들의 무대가 거슬리지 않았던, 아니 한층 더 감동적이라고 느꼈던 관객이 저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예술 혹은 예술가에게 감동받고 열광하는 건 그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이면에 땀과 눈물, 긴 시간에 걸친 헌신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그들의 음악과 몸짓에 세월에 지쳐가는 우리를 위한 작은 위로가 담겨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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