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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요즘 시위 풍속도① - '혼참러'와 '순수한 개인'의 등장

[취재파일] 요즘 시위 풍속도① - '혼참러'와 '순수한 개인'의 등장
“주말에 집회 같이 갈래?” 대학 새내기 시절 학생회를 하는 선배들에게 자주 들었던 질문입니다. 그때도 소위 ‘운동권’ 선배들은 될성부른 후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1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해를 거듭하며 될성부른 후배들은 점점 소멸했습니다. 학생회를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구분하는 게 유명무실할 만큼 학생운동 조직은 작아져갔습니다. ▶ '혼참러'까지 등장…달라지는 한국의 시위문화

최근에는 시위는 나가고 싶은데 함께 나갈만한 조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혼참러’(혼자 참여하는 사람)로 불리는 이들은 페이스북이나 텔레그램 등으로 서로 소통합니다. 모일 장소와 시간을 공유해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시위 일정이나 방식 등 여러 가지 궁금증을 SNS를 통해 해소하기도 합니다. 

● 운동조직의 약화, 개인주의의 발달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혼참러’ 현상의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 번째는 대표성을 뛰는 학생운동 조직들이 급격하게 약화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개인주의 문화가 점점 더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인 자체를 절대적인 단위로 생각하는 문화가 널리 퍼지다 보니 시위에서도 특정 조직이 주도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때 많은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혼자온사람들, 혼참러 SNS 장면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대학생들이 줄줄이 시국선언을 시작할 무렵, 고려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가 최순실 사태를 비판하는 시국선언문을 준비했다 탄핵 위기에 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총학생회가 발표할 예정이었던 ‘백남기는 죽이고 최순실은 살렸다’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에는 다른 여러 학생운동 조직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온라인 등을 통해 시국선언문에 최순실 게이트와 관계없는 백남기 농민 사건을 끌어들였고, 옛 통진당(민중연합당) 등 ‘각종 운동권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총학생회에 대한 탄핵안 발의 서명을 진행했습니다. 탄핵안은 결국 부결됐지만 이 해프닝에서 학생들 사이에 깔린 학생운동 조직과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화여대 시위에서도 다른 이슈나 운동 조직과의 연계가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것으로 인식됐습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시위에서 세월호의 노란 리본이나 위안부 팔찌, 강남역 사건과 관련된 페미니즘 티셔츠와 배지 등의 착용을 금지했습니다. 정치적인 상징들은 배제되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익명의 ‘순수한 개인’들이 참여한다는 것이 강조됐습니다. 미래라이프대학에 대한 반발이 시작될 즈음인 7월 말에는 총학생회 위주로 시위가 이뤄졌지만 이후에는 총학생회가 중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온 학생 개인이 모여 각각의 팀을 꾸려 시위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총학생회나 학생운동 조직들이 이끌던 기존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느린 민주주의’를 표방한 이대 시위에서는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인 ‘이화이언’과 점거중인 본관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이 수렴됐습니다. ‘이화이언’ 커뮤니티는 익명의 ID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이대 시위의 출발(7월27일, ‘벗들 우리 당장 내년부터 미래라이프 대학 신설되는 거 알아?’라는 게시글로 시위 촉발)이자 끝이었습니다. 

● 정치성 배제하면 갈등적인 이슈에서 해결 어려워

이대 학생 시위에서 다른 정치적 이슈를 배제하고 익명의 개인으로 나서는 문화에 대해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정치에 대한 거리감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이 만든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진보단체나 특정 정당 등 어떤 조직에 몸을 담고 있거나 정치적으로 관련됐다고 비판 받으면 실제로 위협이 되는 분위기가 만연해 이화여대 학생들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는 겁니다.

박상훈 학교장은 이러한 문화가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취소처럼 구성원들 상당수가 동의할 만한 문제, 그리고 총장 개인에 대한 퇴진처럼 목표가 명확한 이슈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위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성원들 중에 누군가에는 이익이 되고 누군가에는 손해가 되는 분배와 관련된 문제나,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슈에서는 정치성을 배제하고 익명의 개인으로 활동해서는 장기적으로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화여대 학생 시위 사진
반면 이택광 교수는 이대 시위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취소에서 멈췄으면 ‘기득권 지키기’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 86일간의 본관 점거 농성을 하며 정유라 씨의 문제와 총장 퇴진까지 이끌어낸 점에서 운동의 확장성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개인화되는 학생운동은 “집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을 향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거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단일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만큼 모여서 운동했으니까 됐다’는 선에서 주장만 하다가 끝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면서도 “과거에 조직운동이 가지고 있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측면이 줄어들고, 기발하고 창의적인 운동 방식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운동권 조직의 집중성과 개인주의 문화가 가진 기발함과 창의성이 함께 결합되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 조류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이화여대 시위가 그 단초를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이대 시위에 모인 개인들은 협의를 통해 언론대응팀, 자원봉사팀, 국정감사 대응팀 등을 꾸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하나의 목소리를 보여줬습니다.

● 대통령 하야 집회의 미래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가 연일 열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뜨거운 분위기는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청소년과 50,60대 장년층에서도 참여도가 높고, 시위에 난생 처음 나왔다는 시민들도 많이 보입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도 진보와 보수를 넘나듭니다.
 
시위가 지속되면 점차 이들이 분화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일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를 최순실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인지, 여당이나 보수진영 전체의 문제가 곪아 터진 것으로 볼 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대기업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피해자로 볼 것인지, 공범으로 볼 것인지 또,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할 것인지 탄핵안을 발의할 것인지 등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의 문제에서도 온도차가 생길 것 같습니다. 한두 달이 넘어가면 세월호 사건처럼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피로감을 토로하거나 동정론이 고개를 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날이 뜨거워지는 시위의 열기 속에서 운동 조직과 연계되지 않고 SNS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순수한 개인’과 ‘혼참러’의 등장이 이번 국면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됩니다. 대통령 하야 시위의 종착역에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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