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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힐러리를 가둬라"…멀쩡한 백인들이 트럼프 유세장서 돌변한 이유는?

[취재파일] "힐러리를 가둬라"…멀쩡한 백인들이 트럼프 유세장서 돌변한 이유는?
● 백인 물결 트럼프 유세장에서 판매되는 '증오 상품'

아직까지 백인 중심의 문화가 지배적인 노스캐롤라이나 킨스턴 지역에서 열린 트럼프 지지 유세는(26일) 한국 정치 유세만 경험했던 제게는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차장에서부터 거대한 백인들의 물결이 시작됐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유세장 입구부터 1킬로미터 넘게 이어졌습니다. 집회 장소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 중에 흑인이나 히스패닉은 물론 아시아인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일부 백인들은 신기한지 저한테도 "당신도 트럼프 지지자 맞아요?"라고 질문을 할 정도였습니다. 참전용사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도 많이 보였지만, 의외로 트럼프 지지 T셔츠를 입고, 친구들끼리 온 젊은 백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아이를 안고 가족끼리 나들이 겸해서 나온 사람들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백인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유세장에서 물건 파는 흑인(좌), 힐러리 sucks라는 티셔츠 파는 히스패닉(우)
유세장 입구에서는 트럼프 지지 물품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대다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이었습니다. 이들이 파는 물건은 후보자의 이름이나 응원의 문구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주와 비방 심지어 욕을 담은 것도 상당수였습니다. 힐러리를 비방하는 티셔츠를 파는 사람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힐러리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구호를 외치며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안고 온 가족이라면 눈살을 찌푸릴만한데, 누구하나 이들을 제지하거나 뭐라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념 배지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감옥의 쇠창살과 힐러리의 얼굴을 합성해 '2016년에 힐러리를 감옥에 보내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런 물건은 친구한테도 줘야한다며 여러 개를 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 "워싱턴 관피아, 정피아들은 다 도둑놈들이야"
벵가지 관련해서 푯말 들고 있는 참전용사 모자 쓴 노인 (존 트리벨라, 베트남전 참전 용사)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리며 주변에 있던 트럼프 지지자들과 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를 물어보면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는 아주 친절한 백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베트남 참전 모자를 쓰고 있던 한 백인 노인의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존 트리벨라(베트남전 참전 용사)

"워싱턴은 로비스트들의 천국이다. 이들은 한때 정치인이나 관료들이었는데 현직에서 물러나면 다 로비스트가 돼 국가 시스템을 주무른다.(한국으로 치면 관피아, 정피아쯤 될 듯합니다.) 이들은 다 도둑놈들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미국이 제대로 되는 게 없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이런 시스템이 더 연장될 뿐이다. 힐러리를 막기 위해 나는 트럼프에게 표를 줄 거다."


힐러리가 정말 감옥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이메일 유출 사건을 다른 사람이 저질렀다면 당장 감옥에 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트럼프의 거친 입과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서는 "문제는 있지만 수십 년 전 일이고, 사적으로 한 얘기쯤은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저 평범한 미국 남부 시골 노인의 이런 반응은 기존 정치 시스템에 대한 증오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증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프로레슬링 같은 오버액션 가득한 트럼프 유세장
트럼프 유세장의 모습
트럼프가 오기 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지역 정치인들의 '바람잡이' 찬조연설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트럼프를 이미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활주로에서 열린 집회여서인지 트럼프의 등장부터 극적이었습니다. 지지자들 앞으로 트럼프 참모들이 탄 비행기가 하나씩 내렸습니다. 감동적인 팝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정 시간을 30분 넘겨서 트럼프의 거대한 자가용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습니다. 사람들은 착륙 장면부터 휴대전화로 촬영해가며 흥분했습니다. 옆 사람 말이 안 들릴 정도로 지지자들이 흥분해서 괴성을 지르는 가운데 트럼프가 그대로 활주로에서 내려자마자 단상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트럼프의 지지연설은 다른 곳에서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선거 슬로건에 맞게 미국을 다시 잘 살게 만들겠다는 메시지가 이어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만 잘 살게 해주겠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이 와서 우리 일자리를 뺏어가고 있으니,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국경에 벽을 세우고, 난민은 미국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는 거침없는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힐러리에 대해서는 야비할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는데,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습니다. 힐러리로 대표되는 워싱턴의 썩은 정치를 끝장내기 위해 자신이 백악관에 가야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언론 탓도 이어졌는데, 수십 미터 거리를 두고 연설을 담고 있는 영상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서 가장 나쁘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 저기 기자들이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왜 언론이 자기를 비판하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은 전혀 없었고, 그저 언론 탓만 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일부에서 트럼프가 선거를 포기한 거 아니냐는 기사도 나오지만, 적어도 현장에서 보기에 트럼프는 자기가 승리한다는 강력한 자기 최면에 걸려 있었고,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소 과장된 트럼프가 말과 행동에 지지자들도 과장된 환호와 행동으로 응답했습니다. 연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 프로레슬링 WWE 경기장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 남녀노소 외치는 구호 "힐러리를 가둬라(Lock her up!)"
힐러리 감옥에 보내자는 내용의 배지
힐러리를 비난하는 대목에서 지지자들은 힐러리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연설 중간 중간 "힐러리를 가둬라(Lock her up!)"이라는 구호가 이어졌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고 친절해 보이는 시골 백인 할아버지들도 돌변해서 큰 목소리로 구호를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오바마를 비난하는 대목이 나오면 "오바마를 가둬라(Lock him up!)"는 구호로 조금씩 바꿔가며 비난 구호는 이어졌습니다. 상대 후보를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범죄자로 낙인찍은 트럼프의 발언 이후 지지자들도 똑같이 힐러리를 범죄자 취급할 뿐이었습니다. 

● 증오와 저주의 정치…선거 이후 극복 가능할까?

상대방에 대한 막무가내 비방과 근거 없는 흑색선전은 사실 한국 정치를 비판하면서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선배라는 미국에서도 트럼프 등장 이후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거침없고 여론의 눈치도 보지 않는 트럼프는 우리나라 막말 정치인들이 울고 갈 정도의 대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지지층을 단결시키기 위해 던진 증오와 저주의 막말은 씨앗이 돼 고스란히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납니다. 어지럽고 시끄러운 한국 정치만큼이나 미국 정치도 선거 이후에도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고, 이를 치유하는 건 쉽지 않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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