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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어르신들,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취재파일] "어르신들,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할머니들의 얼굴의 하얀 석고가 얹어졌습니다. 소녀처럼 수줍게 눈을 감고 양손은 포개어 살포시 가슴 위에 얹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다독여준 일이 얼마만인지. 두 다리를 편안하게 쭉 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맡긴 채 누워 있어본 것도 처음입니다. 얼굴의 본을 떠 석고 마스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석고가 굳는 시간 동안 할머니들은 설핏 잠이 들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종로구에서 저소득층 여성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마음 꽃이 피었다’는 프로그램입니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홀로 사는 노인이면 누구든지 신청 가능합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고립된 여성 어르신들의 사회 참여를 돕기 위해 마련된 심리 치료 과정입니다. 거창하게 전문가를 불러 상담을 해주거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심리 치료보단 ‘만들기(?) 시간’에 가깝습니다.

석고 마스크가 얼추 굳자,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햇볕에 말립니다. 그 사이 할머니들은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식사를 하고 산책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만난 인연들이지만, 오랜 친구처럼 서로의 인생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이곳에서는 위축이 되지도, 고립감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석고 마스크에 색칠하는 할머니들
마스크를 잘 말린 뒤에는 붓으로 색을 칠합니다. 평소에 거울도 잘 안 봤다는 어르신들은 오목조목 완성된 자신의 얼굴이 낯설고 신기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보는 시간입니다. 난생 처음 붓을 잡아본다는 어르신부터, 활짝 핀 꽃을 얼굴에 그려 넣는 어르신까지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봅니다.

이 프로그램은 ‘데드 마스크’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습니다. 데드 마스크는 죽은 사람의 얼굴에 점토를 발라 모형을 만든 다음 석고로 떠 그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생의 마지막을 생각해본다는 차원에서 ‘마스크’를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져본 겁니다. 상처가 있다면 치유하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면 이를 떨쳐내는 시간을 가져보고 보다 당당하게 삶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입니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한 참가자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 “내 얼굴이 ‘산 얼굴인가, 죽은 얼굴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습니다. ‘못났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얼굴, ‘실패했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삶을 온전한 모습으로 마주해보는 시간이 된 겁니다. 할머니들의 만든 마스크는 죽음(데드)보단 삶에 더 가까운 의미를 지닙니다. 

복지라고 하면 단순히 장소를 제공하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정신적 복지’도 중요합니다. 꼭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전문적인 기관이 아니더라도 공동체가, 주변 이웃들이 따뜻한 관심을 갖고 내미는 손길들 역시 이런 복지의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멋지게 완성된 마스크가 아닌, 마스크가 만들어지는 시간들이 외롭고 삭막했던 할머님들의 마음속에 물을 주고 꽃을 피웠습니다.   

▶ "어르신,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내면 치유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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