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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우린 제 할 일을 했어"…'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이 영화, 이 대사] "우린 제 할 일을 했어"…'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 영화의 한 장면

* 이 기사엔 어쩌면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부분이 약간 포함돼 있습니다.

한때 국민 필기구로 불리던 볼펜이 있다. 너무 잘 팔려서 제품 이름이 회사 이름이 됐다는 신화의 주인공 ‘모나미 153’이다. 써 본 적이 있든 없든 흰색 육각형 몸통에 ‘153’이 새겨진 이 볼펜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된 것처럼 이 숫자엔 사연이 있다.
 
‘153’의 유래는 성경 구절이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복음 21장 11절>
 
‘153’은 기독교인인 창업주가 사업 초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 성경 구절에서 가져와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숫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153’에 담긴 바람은 멋지게 실현됐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품에 숫자를 새겨 넣은 이들에겐 ‘153’은 기적을 만든 숫자인 셈이다.
 
수학에서도 ‘153’은 아주 특별한 수다. ‘트리플 큐브 넘버’라고 부르는데, 각 자리 숫자들을 각각 세제곱 한 뒤 더했을 때 자신이 나오는 수를 말한다. 1의 세제곱은 1, 5의 세제곱은 125, 3의 세제곱은 27이다. 이렇게 나온 세 숫자를 더하면, 1+125+27=153이 된다.
 
트리플 큐브 넘버는 아주 귀하다. 100부터 1000사이에 153, 370, 371, 407 이렇게 네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만하면 기적까지는 몰라도 마법의 수쯤은 되는 셈이다.
 
갑자기 ‘153’이라는 숫자가 뇌 속을 점령해 버린 건 거짓말 같은 기적 때문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 등장하는 2009년 미국에서 실제 일어났던 항공기 사고 얘기다. 이륙 직후 새떼와 충돌해 양쪽 엔진이 모두 손상된 여객기를 허드슨강 위에 동체착륙 시켜 탑승자 전원을 안전하게 구해 낸 기장 ‘설리’의 실화가 바탕이다.
 
당시 비행기엔 모두 155명이 타고 있었다. 조종실에 앉아있던 기장과 부기장을 제외하면, 승무원 3명을 포함한 객실 탑승자 숫자가 정확히 153명이다. 
 
영화는 당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고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면서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까지 담아 묵직한 울림을 준다. 북미 지역에서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첫 주에만 3천5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챙겼다.
 
영화의 돌풍엔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노련한 연출이 한몫을 크게 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특히 설리 역을 맡아 열연한 톰 행크스는 벌써부터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기적 같은 해피엔딩’이 주는 감동이다. 그 감동에서 가지를 치고 쭉쭉 뻗어 나오는 희망과 용기가 그 사고를 기억하는 미국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해피엔딩을 보면서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어떤 이들은 아프다.
 
비상착수를 결정한 즉시 마이크를 켜고 승객들에게 “충돌에 대비하라”고 알리는 설리 기장의 모습을 보면서 아프다. 꼿꼿이 등을 세우고 승객들을 마주 보며 앉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침착하게 한목소리로 겁에 질린 승객들을 이끄는 승무원들을 보면서 아프다. 모두 빠져나간 걸 두 번이나 확인한 뒤 조종실로 돌아가 일지를 챙겨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기장의 모습을 보면서 아프다.
 
가장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건 블랙박스에 녹음된 사고 당시 상황들을 확인한 뒤 설리가 부기장에게 던지는 한 마디다. “우린 제 할 일을 했어(We did our job).” 세계 항공사에 기록될만한 기적을 만든 영웅의 비결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싱겁다. “내 할 일을 했어.”

너무 싱겁다. 너무 싱겁고 너무 쉽다. 너무 쉽고 간단하다. 그래서 아프다.
 
무심한 듯, 그러나 깊은 안도감과 자부심을 꾹꾹 눌러 담아 던지는 그 한마디를 듣고 있자니 여러 숫자들이 머릿속에 오버랩 된다. 155/304. 2009/2014. 115/416…. 그 숫자들을 마음속으로 차례차례 짚어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짐 비슷한 걸 하게 된다.

그래. 내 할 일을 하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할 일을 하자. 내 할 일만이라도 잘 하자. 다들.

기적은 멀리 있지만 기적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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