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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서슬 퍼런 왕후조차 조선의 애달픈 어머니였다

'덕온공주 한글 자료' 전시에 담긴 이야기

[취재파일] 서슬 퍼런 왕후조차 조선의 애달픈 어머니였다
길이 5미터가 넘는 기다란 분홍색 종이 위에 한글 글씨가 가지런히 적혔습니다. 노리개, 비녀, 댕기 등의 장신구부터 사발, 대접, 가위, 인두 같은 살림도구는 물론 망원경을 뜻하는 천리경까지, 온갖 물건을 적은 이 사료는 혼수발기, 즉 딸을 시집 보내며 마련한 혼수품의 목록을 적은 기록입니다.

도대체 이 호사스런 혼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소소한 것부터 진귀한 것까지 수백 가지의 물품 목록을 보며 주인공이 높은 신분의 인물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막내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1822~1844)로, 자료는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37년 음력 8월 13일 치러진 그녀의 혼례에 관한 기록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음력 8월 13일인 9월 13일에 맞춰 덕온공주 혼례와 관련된 자료 29건 41점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분홍색 종이 위에 적힌 딸에게 주는 혼수품 목록 외에도 노란색 종이 위에 적힌 사위에게 주는 혼수품 목록, 그리고 딸을 시집 보낸 뒤 딸과 사위에게 보낸 편지 등이 포함됐습니다.
사위에게 주는 혼수발기
딸을 시집 보낸 어머니는 순원왕후(1789~1857). 그녀는 세도가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순조의 정비가 되었고 이후 30여년을 왕비로 살았습니다. 순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68세까지 장수하며 헌종과 철종, 두 왕의 재위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무려 10년이나 수렴청정을 한, 조선후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여성입니다.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 이보다 더한 권세를 누린 이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순원왕후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슬픔도 묻어납니다. 2남4녀를 낳았지만 큰 아들인 효명세자가 21살을 넘기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 것을 비롯해 2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모두 요절했습니다. 그리하여 1834년 남편인 순조가 승하할 때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자식이 바로 덕온공주였으니, 그 딸을 시집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지는 대략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 왕가에서는 보통 10대 초반에 딸을 시집 보냈다고 하는데, 덕온은 1830년부터 34년까지 큰오빠와 두 명의 언니, 아버지의 상을 계속하여 치르는 바람에 혼인이 좀 늦어진 경우라고 합니다. 어찌됐든 순원왕후의 막내딸은 16살이 되던 해 생원 윤치승의 아들 윤의선(1823~1887)과 혼인을 하고 오늘날 서울의 중구에 위치한 저동에 살림집을 차려 나갔습니다.

비록 서슬 퍼런 순원왕후의 하나 남은 딸이기는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래도 출가외인. 시집을 간 뒤 공주는 궁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공식적인 왕실 행사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궁 출입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머니 순원왕후와 딸 덕온공주는 사위 윤의선을 통해 한글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고, 이 자료들이 윤의선의 후손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겁니다.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들
이 편지들을 보면 순원왕후가 공주의 병약함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순원왕후는 딸과 사위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는데, 많은 내용이 딸의 병증을 염려하고 약 사용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마철 더위가 심하니 (염려) 떨쳐 버리지 못했는데, 더윗병으로 깨끗이 낫지 않았는가 싶으니 오늘은 어떠한지 염려하며, 덕온도 일전 두드러기 기운이 있고 날이 더워 그러한지 무엇 때문에 그런지 뒤척이고, 마른 안질도 있고 깔깔하게 말라 보이기에 오창렬에게 물어 약방문을 내어 그제와 어제까지 두 첩 먹었으나, 두드러기는 묵던 날 밤부터 괜찮았는데, 이 약은 두드러기 말 하고 넣은 것이니 괜찮을지 의심스러워 약방문을 보내니, 보고서 물어 보소.… (현대어 풀이: 국립한글박물관)

덕온공주가 낳은 첫째 아기가 병약하자 그에 대한 갑갑함을 호소하며 약 사용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아픈 손주와 그로 인해 속앓이 할 딸을 생각하며 애달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전해집니다.

아기가 매우 민망한가 싶으니 갑갑하여 승지께서 나오셔서 보시고 약이나 의논이라도 하여 보면 싶다. 어찌하면 좋을꼬. 갑갑하다. (현대어 풀이: 국립한글박물관)

순원왕후의 마음 졸임에도 덕온공주의 첫째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덕온공주마저 23살이 되는 해 세상을 떠납니다. 둘째 아기를 임신한 몸으로 헌종의 둘째 부인을 뽑는 행사에 참가했다가 점심을 먹고 체해 그날 저녁 뱃속의 아기를 사산하고 황망하게 숨졌다고 합니다.

비록 당대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지만, 하나 남은 자식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순원왕후가 딸과 사위에게 쓴 편지에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아 정확한 작성연도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주가 시집을 간 1837년부터 숨진 1844년까지 그 사이에 쓴 것임을 추정해 볼 뿐입니다.

그런 편지들 속에 가장 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순원왕후가 딸의 제사상에 올릴 것들을 사위에게 써서 보낸 문서입니다. 그 안에는 일반적인 제사상에선 보기 어려운 음식들도 있는데, 당시 왕가의 풍습이었는지 혹은 덕온공주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음식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습니다.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이란 이름이 붙은 덕온공주 한글 자료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 18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여성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조선시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 있던 여성조차 시집 보낸 딸을 노심초사 걱정하며 이토록 애달프고 그리움 많은 삶을 살았다니, 이름조차 없이 살다간 그 무수한 어머니와 딸들의 그리움과 한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처지가 새삼 애처로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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