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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발레리나는 무엇으로 사는가…국립발레단 최장기 수석무용수 김지영

[취재파일] 발레리나는 무엇으로 사는가…국립발레단 최장기 수석무용수 김지영
폭염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지난주 서울 우면동 국립발레단 연습실. 일주일 뒤 막이 오르는 정기공연 ‘스파르타쿠스’ 연습이 한창이었다. 총 3막으로 구성된 ‘스파르타쿠스’의 전체를 부분 부분으로 나뉘어 철저하게 연습하는 중.
 
자신이 출연중인 부분이 없어 잠시 짬이 생긴 무용수들은 복도 이곳저곳에서 쉬고 있었다. 복도 한 켠, 가녀린 여성무용수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의 그녀는 스트레칭을 한 뒤 풀린 몸 상태가 마음에 들었는지, ‘씩’하고 웃더니 옆에 있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이 여성이 바로 현재 활동하는 한국의 발레리나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췄다고 인정받는 국립발레단 최장기 수석무용수인 김지영.
 
이날 점심은 연습과 연습 사이에 짬이 날 때 이렇게 먹는 빵집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마요네즈 등 소스가 듬뿍 묻어있는 고열량의 샌드위치를,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아니, 발레리나는 원래 새 모이만큼 먹는 거 아니었나?’ ‘이렇게 드셔도 몸매 관리가 됩니까?’ 라는 기자의 생각을 읽었는지, 김지영은 싱긋 미소 짓더니 말했다.
 
“저 먹는 걸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놀래요. 너무 잘 먹으니까.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더 잘 먹고, 많이 먹을걸요. 발레는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매 동작을 하기 위해선 엄청난 체력과 에너지가 필요해요. 발레리나가 조금 먹을 것이란 건 편견일 뿐이죠. 프로 발레단에 속해서 매일 연습을 하는 프로 무용수들은 정말 많이 먹는답니다.”
 
많이 먹을 뿐 아니라 굳이 건강식으로 챙겨서 먹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라면이나 분식 같은 고열량 음식도 마음껏 먹어요. 공연 앞두고 연습할 땐 하루 10시간 이상 춤을 추니까 엄청난 칼로리를 먹어도 금방 소모되죠.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면 너무 녹초가 된 상태라 쓰러져서 자기 바쁘고, 아침에는 빨리 나와서 연습하기 바쁘니까, 집에서 건강식으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챙겨 오진 못해요.”
 
발레리나는 무지방 요거트나 닭가슴살 같은 다이어트 음식만 먹을 것이란 편견을 여지없이 깨게 하는 대화를 나눈 뒤, 김지영은 바로 연습실로 들어갔다.
 
김지영이 이번에 스파르타쿠스에서 맡은 역할은 '타이틀 롤'인 스파르타쿠스의 연인 프리기아.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로 끌려가면서 헤어지게 된 비극적인 상황을 춤으로 표현하는 1막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연기하기 시작한 김지영. 정말 춤을 춘지 10분도 안되어서 온몸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발레는 온 몸의 근육 세포에 힘을 주고 매 동작을 해야 하거든요. 그냥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순해 보이는 동작도 사실은 전혀 쉽거나 단순하지 않아요. 관객들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동작을 연속으로 보여드리기 위해선 늘 온 몸에 힘을 주고 긴장한 상태로 고난도의 동작들을 이어가야 하죠. 그러니 땀이 비오듯 나는 건 당연하고요. ”
 
연습을 지켜보니 무대 위에서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처럼 힘차게 날아오르거나 사뿐히 턴을 하는 동작을 하기 위해선 조금만 먹을 것이란 생각은 얼마나 아둔한 것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보여 주기 위해선,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엄청난 강도의 연습과 땀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이치를, 발레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멋진 표정에 매혹되어 간과한 것이다.
 
공연을 앞둔 공식 연습만 오전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 무려 7시간. 그러나 공식 연습 시간 전과 후에도 다들 개인연습을 했고, 올해 국립발레단 입단 20년차를 맞는 최장기 수석무용수 김지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발레리나 가운데 가장 춤을 잘 춘다고 인정받는 위치인데, 여전히 하루 10시간 넘게 연습을 하는 그녀.

“지겹거나 힘들진 않을까”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물론 힘들죠. 그런데 프로페셔널 발레무용수로 20년을 맞이하게 된 시점이 되니까, 발레에 대해 ‘참 고맙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춤을 출 때 세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느껴보지 못하는 절정의 충만감을 나에게 주니까요. 사실 예전에는 저의 춤을 보고 칭찬을 해주시면 쑥스럽기만 하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잘 하지 못했어요. 그저 더 잘 추고 싶다는 생각에 칭찬을 누릴 여유도 없었던 거죠. 그런데 요즘은 칭찬을 해주시면 너무 좋아요. 내가 얼마나 발레를 사랑하는지,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요.”
 
1996년 발레최강국이라 부리는 러시아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래 이미 10년 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까지 역임한 김지영.
 
미국, 프랑스, 러시아의 최고 권위 발레대회에서 받은 상과 수많은 무수히 많은 공연에서의 박수갈채, 평론가들의 극찬을 뒤로 하고 그녀는 오늘도 연습을 한다.
“발레는 육체적인 부분이 참 중요한 예술이죠. 신체 비율이나 체격 조건 등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구요. 고난이도의 동작을 완벽하게 구현해야 되기 때문에 사실 아주 나이가 많이 들면, 하고 싶어도 계속 할 수 없는 예술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전 발레의 그런 가혹한 부분까지도 사랑해요. 언젠가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이 오겠죠.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관객들에게 잠시라도 위안과 울림을 주는 춤을, 아주 잘 추고 싶어요.”
 
발레는 찰나의 예술이다. 발레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믿기지 않게 멋진 동작들 모두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노력과 정성과 땀이 만들어낸 정직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춤을 추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해요.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저 내가 정말 추고 싶은 춤을 출 뿐인데, 그로 인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박수갈채까지 받으니.’ 생계를 위해, 타인의 시선 때문에, 진정 하고 싶지 않은 직업에 종사해야만 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는 더욱 무대에서 제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상의 춤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힘들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고, 그런 가치는 발레와 같은 예술이 주는 기쁨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거든요.”

그녀의 발레는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신체적 나이에 굴하지 않은 그녀는 전석매진을 기록한 이번 ‘스파르타쿠스’ 공연에서도 기립박수와 함께 최고의 무대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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