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임신하려면 따라야 할 암묵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병원 내 간호사들끼리 2명 이상 임신하지 않도록 순번을 정해 놓는 이른바 ‘임신순번제’입니다. 모든 병원이 다 그런 건 아니고, 주로 24시간 병동을 지켜야 하는 3교대 근무형태인 간호부에서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습니다.
SBS 취재진은 실제 임신순번제를 경험했던 간호사를 만나서 어떤 식으로 순번제가 운영됐는지 자세한 내막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실상을 밝히면서, 임신순번제가 가임기의 당사자들에게는 가혹한 처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장 내 동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차선책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습니다. <편집자 주>
▷기자: 현재 아이가 있나요?
▶간호사: 네, 둘 있습니다.
▷기자: 두 아이를 임신순번제에 맞춰 출산하신 건가요?
▶간호사: 네, 그래요. 2012년이랑 2015년에 첫째랑 둘째를 각각 낳았죠. 모두 제 임신순번에 맞췄습니다.
▷기자: 임신순번제에 대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언제죠?
▶간호사: 첫째 아이를 갖기 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선배님 한 분이 불임을 겪고 있어서 치료받고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결혼하자, 임신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고 자세히 묻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불임 치료를 받고 있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임신 기회가 많다며, 근무가 안 돌아갈 수 있으니까 조금 늦춰서 임신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어요.
▷기자: 그러니까 선배의 말은 자신이 먼저 임신을 준비하고 있으니, 네가 순번을 양보해달라는 건가요?
▶간호사: 네, 맞아요. 같은 간호부에서 두 명 이상 임신 계획이 있을 땐 이렇게 ‘내가 먼저 할 테니, 넌 그다음에 해’라는 식으로 순서를 정하는 거죠.
▷기자: 병원에서 조직적인 지시로 내려오는 건가요?
▶간호사: 아뇨, 간호부 내에서 간호사끼리 암암리에 얘기하는 거예요. 물론 수선생님이 간호부의 전체 간호사 인력을 관리하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임신순번을 정하고 난 뒤에는 수선생님들에게도 말씀드리죠. 같은 부서에서 절대로 두 명 이상 동시에 임신을 안 했으면 하고 말씀하시죠. 만약에 두 명 이상 임신하게 되면 임신한 간호사가 없는 다른 병동으로 인사조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항도 명시하고요. 암암리의 룰 같은 거죠.
▷기자: 그런 임신순번을 짜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
▶간호사: 병원이 24시간 운영되니까 한 달 야간근무를 다 채우려면 최소 필요한 인력이 있죠. 그런데 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죠. 이때 두 명 이상 임신해서 둘 다 야간근무를 빠지면 빈자리가 아주 커요. 결국, 다른 동료 간호사들이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거죠.
▶간호사: 제가 있는 곳은 인력이 적을 땐 11명에서, 많으면 12명이 있어요. 이 인원으로 데이(낮), 이브닝(저녁), 나이트(밤)으로 나눠서 3교대로 일하고 있어요.
▷기자: 어쨌든 임신하면 야간근무에서 빠지는 것이군요?
▶간호사: 저희 병원은 아직, 임신이 위험한 기간에만 밤 근무를 빼주고 있고요. 초기만 안 하지, 임신 중기부터는 다시 하고 있어요.
▷기자: 임신한 몸으로도 밤 근무를 한다고요?
▶간호사: 임신하면 초기에 엄청 힘들거든요. 힘든데 밤 근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밤 근무를 안 하면 선배들이 더해야 하니까 다시 나오는 거죠. 그러면서 자필로 동의서를 쓰게 해요. 사인도 하게 되고요. 내용은 제가 밤 근무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밤 근무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겠다는 내용이에요.
▷기자: 임신순번이 깨진 적은요?
▶간호사: 순번을 깨고 임신을 한 상황이 돼도 분위기상 말을 쉽게 꺼내기가 어려워요. 어린 친구들일수록 선배 간호사들이 야간근무를 더 많이 해야 하기에 눈치 보면서 말을 못하는 거죠. 그렇다고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야간근무는 피할 수 없어요. 제가 아는 후배 둘도 임신 사실을 숨기고 야간근무를 했다가 자연 유산했죠.
▷기자: 그럼 눈치 보더라도 말하는 게 낫겠네요.
▶간호사: 막내 간호사가 결혼 전인데 갑자기 임신한 적이 있었죠. 수선생님은 막내 간호사에게 아직 결혼을 안 한 상황에서 임신을 한 거니까 결혼 이후 휴가를 받는 게 어떻겠느냐, 그 이후에 야간근무를 빼주겠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죠. 임신사실을 알렸어도 결혼 전까지는 야간근무를 해야 했어요.
▷기자: 임신순번에 대해 솔직히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간호사: 당사자들이 느끼기에는 참 불합리하죠. 요즘 불임에 유산까지 많은 상황에서 임신이 안 될 수도 있는데, 순번에 맞춰 임신하는 것도 스트레스거든요. 굉장히 불합리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순번을 안 지키면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아무 말 없이 따르게 되죠.
[ 유지현/ 전국 보건의료 산업 노동조합 위원장 ]
“우리나라는 보건의료인력이 OECD 국가 중 평균 절반 수준밖에 안 됩니다. 한 부서에서 동시에 두세 명이 임신을 할 경우,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없으니 임신 순번제는 필수가 돼버리는 거죠. 법이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바뀌어 그 법을 쫓아갈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축돼야 하는데, 병원계는 이런 인력 인프라가 없습니다.”
기획·구성 : 임태우·김미화 / 디자인 : 정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