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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여성 대통령 시대의 '여성 혐오'

정치에 나타난 여성 혐오와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취재파일] 여성 대통령 시대의 '여성 혐오'
지난 3월, 총선 민심 취재를 위해 대구를 갔습니다. 당시 대구는 새누리당 공천 갈등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유승민 의원 공천을 두고 여당 내 공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물었습니다.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차치하겠습니다. 대구의 한 공원에서 어르신 세 분을 만났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확실한 대통령 지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두 분의 말에 특이한 화법이 있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이란 표현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비록 여성이지만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냐. 야당은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데 대통령이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대구 시민)
지금 저는 새누리당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현실 정치 최전선에 있습니다. 정파적 권력에 민첩하게 훈육되고 있다는 뜻이고, 달리 말하면 일상 권력에 그만큼 둔감해지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 싸움을 중계하는 데 힘을 빼다보니 정작 중요한 걸 놓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여성 국회의원은 6명이었습니다. 서울 서초갑 이혜훈, 동작을 나경원, 강남병 이은재, 송파갑 박인숙, 안산단원을 박순자, 포항북 김정재 의원입니다. 이 가운데 이은재, 박순자, 김정재 의원은 '여성 우선 추천'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이런 혜택을 받지 않고 당선된 새누리당 여성 지역구 의원은 3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알아차리게 된 건 총선이 무려 두 달이나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 6명 의원 가운데 한 명과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무심도 하죠. 공천과 총선 정국 내내 친박계과 비박계, 두 거대 계파 취재에 정신이 팔려 우리 일상의 절반인 여성 권력 문제에 둔감했던 모양입니다.

"새누리당 지역구 의원 가운데 여성 우선 추천 없이 당선된 의원은 딱 3명뿐이다. 새누리당이 그만큼 남성 중심적이란 방증이기도 하지만, 여성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게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유권자의 절반이 여성인데, 왜 그럴까." (새누리당 A 여성 의원)
호주의 사회학자 마이클 플러드가 말하는 여성 혐오(hatred of women)는 그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가부장제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문화 현상을 아우릅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성 스스로에게도 나타난다고 봤습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형 수술 열풍, 다이어트로 인한 거식증까지도 그 사례로 들었습니다.

여성끼리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TV 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에서 걸핏하면 나오는 고부 갈등을 들 수 있습니다. 며느리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그 시어머니도 불과 이삼십 년 전에는 누군가의 억압을 받는 며느리였을 테니까요. 우리 시대 여성 혐오는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차이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선을 딱 긋고, 여성은 폭력의 피해자 남성은 폭력의 가해자로 도식화할 수만은 없습니다. 마이클 플러드의 여성 혐오는 가부장제와 맞닿아 있는 '문화적 현상'이지, '기괴한 정신병'이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사람조차 정치적 평가를 내릴 때 '비록 여성이지만'이란 수식어가 튀어나오는 현실. 유권자의 절반이 여성이지만, 여성 정치인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게 쉽지 않은 문화. 적어도 마이클 플러드의 분석대로라면, 이 역시 '여성 혐오'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이 정치 영역, 권력의 영역에 편입하는 것에 대한 인색함을 전제하고 있을 테니까요. 유권자의 절반이 여성이니, 인색함은 남성은 물론 여성까지 망라하고 있습니다. 제도는 여성을 배려한다고 생색을 내지만, 문화는 또 다른 문제인 게 현실입니다.
검찰이 강남역 살인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해 남성 김 모 씨는 사건 발생 이틀 전 여성이 던진 담배꽁초에 신발을 맞아 생긴 분노 때문에 무자비한 살인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때문에 검찰은 여성 혐오는 아니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만일 김 씨가 남성이 던진 담배꽁초에 맞았었다면 어땠을까요. 남성에 대한 분노가 생겨 길 가던 남성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을까요. 김 씨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꽁초를 아무데다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꽁초를 아무데다 버리는 '여성'을 괘씸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담배 피우는 여성을 혐오하는 우리 문화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정치인들 싸우는 것에 매몰돼 여성 권력의 문제를 간과했던 기자나, 수사에 열을 다하느라 혐오의 정의를 애써 뭉갰던 검사나, 세상을 편협하게 보는 건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검사도 그렇고, 우리 공부 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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