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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취재파일⑬] 아들과 달린 아버지, 세계를 울리다

[리우 취재파일⑬] 아들과 달린 아버지, 세계를 울리다
▲ 데릭 레드몬드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영국 단거리 육상 선수인 데릭 레드몬드는 청소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유망주였습니다. 19살에 영국 400m 신기록을 세울 정도였으니까요. 23살이던 1988년,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서울올림픽에 출전합니다. 비록 금메달은 장담하기 힘들었지만 메달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출전을 10분 앞두고 몸을 풀다가 갑자기 아킬레스건을 다친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출전하려고 했지만 걷기조차 힘들어 결국 기권했습니다. 올림픽 메달을 날려버린 23살 청년은 절망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인생의 꿈인 올림픽 메달을 따겠다고 단단히 별렀습니다. 컨디션도 최상이었지요. 그의 아버지 짐 레드몬드도 관중석에 앉아 아들을 응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평소 부자지간이라기보다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었습니다. 그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데릭 레드몬드는 준결승에 나섰습니다. 8명이 뛰는 준결승에서 상위 4위안에만 진입하면 결승에 진출하게 돼 있었습니다. 스타디움은 6만5천 명의 관중으로 가득 찼습니다. 출발 총성과 함께 데릭은 힘차게 뛰어 나갔습니다. 아들이 처음부터 선두에 나서자 아버지 짐은 “좋아, 계속 그렇게만 하면 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150m까지 1위로 달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 데릭은 달리다가 ‘뚝’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오른쪽 햄스트링(허벅지 뒤쪽 근육)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갑자기 총 맞은 사람처럼 절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해 오른쪽 햄스트링을 붙잡고 트랙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아버지 짐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 채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아들이 계속 고통스러워하자 아버지는 관중석 맨 윗줄에서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급하게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내려오는 바람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트랙에 들어올 수 있는 그 어떤 출입 허가증도 없었지만 오직 아들을 도와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번개 같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트랙에 쓰러진 데릭은 햄스트링 파열에서 오는 통증보다 인생의 꿈인 올림픽 메달이 다시 한 번 무산됐다는 좌절감이 더 참기 힘들었습니다. “이제 나의 올림픽은 여기서 끝났구나!”는 허탈감에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적셨습니다.
 
바로 이때 응급 의료팀이 ‘들것’을 갖고 그에게 왔습니다. 하지만 데릭은 “안 돼요. 들것에 절대 탈 수 없어요. 완주할 게요”라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올림픽 메달은 이미 날아갔지만 결승선마저 통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인생의 패배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릭은 천천히 일어나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다른 주자들은 경기를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리 하나로 레이스를 계속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말이지요. 관중들은 처음엔 반신반의하다가 데릭이 처절한 투혼을 보이자 모두 일어나서 응원의 함성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데릭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달렸습니다. 관중의 박수에 답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완주를 선택한 것이지요. 
데릭 레드몬드와 그의 아버지 (사진=insidethegames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고통으로 얼굴이 찡그려졌습니다. 이 때 아버지 짐이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트랙에 들어섰습니다. 2명의 경기 진행 요원이 제지하자 “내 아들이 저기 있어요. 그 아이를 도와야 해요”라고 소리치며 요원들을 뿌리쳤습니다.
 
급히 달려온 아버지는 힘들어하는 아들의 허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아들도 팔을 뻗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의지했지요. 아버지는 데릭의 어깨를 두드리며 “끝까지 완주할 필요가 없다. 무리하면 영원히 뛸 수 없게 된다”며 만류했지만, 아들은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어요”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럼 함께 완주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이 때 다시 한 번 대회 운영 요원이 아버지 짐에게 트랙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지만 부자의 완주에 방해가 될 수는 없었지요. 이후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이 된 듯 결승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두 부자는 약 2분 10초에 400m를 완주했습니다. 육상 400m 사상 가장 느린 기록이었음은 물론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데릭은 규정상으로는 당연히 실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역사에 전무후무한 ‘부자 동반 레이스’는 모두를 울렸습니다. 레드몬드 부자 두 사람도 울었고, 6만5천명의 관중도 울었고, TV로 지켜본 지구촌 시청자도 울었습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아들 데릭은 “사람들이 나를 바보로 생각할 지, 아니면 영웅으로 생각할 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완주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이기 때문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아버지 짐은 “나는 내 아들이 가장 자랑스럽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만약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이만큼 내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며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들의 투혼과 아버지의 지극한 정이 한데 어우러진 이 감동적인 장면으로 두 사람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아들 데릭은 은퇴 이후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심어주고 인생이 교훈을 깨닫게 해주는 전문 강사로 활동했고, 아버지 짐은 2012년 런던올림픽 성화 봉송 첫 주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육상 400m에서 나온 레드몬드 부자의 감동 스토리는 올림픽 정신과 휴머니즘이 어우러진 명장면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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