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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반성문부터 탄원서까지…대필, 어디까지 해봤니?

[리포트+] 반성문부터 탄원서까지…대필, 어디까지 해봤니?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재판장님! 저는 차가운 유치장 구석에 웅크려 앉아 눈물로 밤을 지새운 뒤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리고 유약한 저는 교도소의 거대한 회색 빛 장벽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장벽 위를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들. 교도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이 글이 어떤 글인지 짐작가시나요? 이 글은 재판에서 피고인이 담당 판사에게 제출하는 반성문입니다. 반성문은 판사가 요청하여 제출하는 경우가 많지만 양형에 고려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피고인이 능동적으로 제출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반성문은 법률 관련 문서를 대필하는 업체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반성문 모범답안'을 재구성해 작성했습니다. 피고인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피고인의 인생기록을 담은 '대필 반성문'인 것입니다. 자기소개서와 논문, 연애편지 뿐만 아니라 반성문, 탄원서, 호소문까지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맡기는 대필 행태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 대필은 불법이 아닌가요?

대필 행위에 대한 처벌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대필'의 판단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입시나 채용과정에서 대필 자기소개서를 제출할 경우에는 업무방해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입시와 채용을 학교와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업무 처리 과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대필작가에게 전달한 경우입니다. 내용에 허위가 없고, 글을 작성해주는 '기술'의 대가로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일종의 첨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문 대필도 비슷한 문제로 처벌이 어렵습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논문 대필 행위는 사립학교의 경우 업무방해죄, 공립학교의 경우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문에 어느 정도 참여 했는지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그 기여도에 따라 글을 수정해주는 것으로 판단돼 처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법률 관련 서식과 반성문 등의 대필에는 법적인 제제를 가할 수 있습니다. 법률 관련 문서 작성의 대리권이 변호사나 법무사로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필이 발각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필을 검증할 실질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벌은커녕 발각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 대필…도대체 어디까지 왔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대필'을 검색하면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업체가 등장합니다. 자기소개서나 자서전, 연설문 등 유형에 제약 없이 다양한 대필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법률 관련 서식, 반성문, 탄원서만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있습니다. SNS를 통해 대필 업체의 홍보가 활성화되면서 접근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한 대필 업체는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폭력, 명예훼손 반성문' 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고객을 유혹합니다. 심지어 감형 적중률이 87%에 달한다며 감형 받은 사례를 홍보하며 대필을 추천합니다. 이처럼 대필 시장이 확산되자 정식 대필작가로 등록되는 '한국대필작가협회'도 결성되었습니다.

연애편지를 전문으로 대필해주는 한 사이트는 '청혼편지', '헤어진 연인을 붙잡는 편지' 등으로 상품명을 붙여 2만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전문성이 필요한 반성문, 탄원서 등은 A4 2장 기준으로 9만~10만원에 거래되고 석박사 논문은 200만원~300만원에 거래됩니다. 대필이 전문 업체에서만 성행하는 것일까요?

올해 초, 계약직 연구교수에게 논문을 대필 시킨 한 사립대 교수들에게 업무방해 혐의로 집행유예가 확정되었습니다. 2014년에는 모 의과대학 교수들이 현업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논문을 대필해 적발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교수들이 박사 논문은 편당 1천만∼1천200만원, 석사 논문은 360만∼550만원을 받고 논문 구상에서부터 학사과정 편의, 심사까지 일체의 과정을 대신해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학교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대필은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 29%는 본인의 창작물을 타인이 가로채기 하거나 타인을 위해 대필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대필 대상은 '사내용 보고서, 기획안 제작’이 35%로 가장 많았습니다. 대필 행위가 개인적인 목적을 넘어 학교, 직장 등 조직 내에서도 관행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 적극적으로 대필해도 좋다

인크루트에서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기소개서 대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취업준비생은 전체의 41.0%에 달했습니다. 이 가운데 25.2%는 '기회와 비용이 있다면 대필해도 무방'이라고 답했으며 15.8%는 '자소서 작성 능력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대필해도 좋다'라고 답했습니다.

각박한 사회에서 기회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들의 간절함도 충분히 이해된다고 말합니다. 또 한편에서는 대필을 제재하고 처벌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필을 범법 행위로 여기지 않는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일자리나 학위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되고, 내가 살아온 삶을 타인이 작성해주는 사회. 여러분이라면 '대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획/구성 : 김수영, 장아람
그래픽 : 정혜연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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